수 천 년 전부터 굽이쳐 내려온 낙동강은 동 남해 바다로 흘러들면서 삼각주를 만들었다. 그 삼각주가 형성된 곳이 지금의 부산 강서구이며 삼각주의 상단지역에 대저동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토질이 비옥하여 벼농사는 물론 과수농사와 원예작물, 고등소채(高等蔬菜) 등 의 농업이 발달하여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1910년 일제의 강제에 의한 한일 합방이 되고나서 이곳의 비옥한 토지를 탐한 왜정은 동양척식회사 분소를 세우고 우리의 토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1910년에서 1930년대 까지 이곳에는 일본정부의 막대한 농자금을 지원받은 일본인 농부들이 대거 넘어왔다. 그들은 동척(동양척식 주식회사)을 통해 농지를 수천 수 만평씩 매입했고, 배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만들었다. 물론 일꾼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가지고온 건축자재로 웅장한 저택을 짓고 소나무, 전나무 등의 고급 수종으로 정원을 꾸며 위엄을 갖추었다.

이곳에서 수확된 배는 1933년 완공된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길이를 자랑 하던 낙동장교(일명 구포다리1,060m)를 건너 구포역에 집결되어 주로 서울로 올라갔으며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해방이 되고나서 대저지역의 배는 최고의 생산량으로 전국 각지로 팔려 나갔으며 교과서에서 까지 구포의 배로 소개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배 협동조합이 만들어져 공동 출하를 하기도 했다.

배는 고급과일이자 기침, 배뇨, 기관지 치료에 쓰이는 약재이기도 하면서 제사상에 오르는 과일이다. 우리가 쉽게 먹는 과일들을 생산하는 과수원은 일거리가 굉장히 많다. 식재 후 첫 수확까지 수년이 걸리는데 그동안 퇴비를 주어야하고 가지치기와 농약살포 등 엄청난 노력과 일손을 필요로 한다. 농한기가 없는 농사가 과수농사이고 해충이 많이 달라붙어 농약도 많이 쳐야한다. 당시 파라치온(parathion 농업용 살충제, 지금은 금지약품)이라는 유독성 농약을 살포했는데 이에 중독되는 사고도 빈번하였다.

과수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봉지를 씌어 병충해와 농약으로부터 보호하고 껍질을 부드럽게 하여 좋은 색깔과 모양을 낸 후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는다. 그런데 과수의 맛과 당도를 높이는 데는 퇴비가 좌우한다. 요즈음은 화학 비료와 숙성된 퇴비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농약도 저 독성인데다 잔류성분이 오래가지 않고, 과실의 당도를 높이는 영양제도 개발되어 소비자가 질 좋은 상품을 쉽게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비료를 쉽게 구할 수 없으니 인분을 비료로 사용했다.

과수원에는 엄청나게 큰 인분저장 항아리(똥통)가 여러 개가 있었다. 과수원 마다 바닥을 깊게 파고 시멘트로 만든 초대형 인분 저장 통을 준비하는데 생긴 모양은 마치 요강과 같이 생겼었다. 인분은 부산시내의 화장실을 수거하여 낙동강 물길을 이용 배(선박 일명 똥배)로 대량 운송이 되었고 강을 건너온 인분은 강가에서 달구지로 옮겨져 배 밭의 저장 통으로 다시 옮겨져 비축되었다. 인분은 농장주에게는 배 농사를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자산이었다.

차량 사정이 조금씩 나아지자 나루터에서 먼 농장에는 차량으로 직접 운송되었는데 인분수송차량은 주로2.5톤 J계열 차량(일제차)에 철판을 사각으로 용접하여 저장용기를 만들었다. 탱크의 중앙 상단에는 말 통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사각의 돌출된 입구가 있고 철판으로 만든 마개가 있었다. 이 구멍에 주택에서 수거된 인분을 어깨 짐 통으로 2통씩 메고 와서 차량위의 투입구에 들어 올려 붓는다. 퇴출구 역시 사각으로 만들었는데 뒤로 제법 빠져나와 있고 폐타이어 튜브를 오려 패킹을 만들어 누수처리를 하고 레버를 사용해 개폐를 하도록 만들었다. 모두 사각으로 제작된 이유는 원통형으로 만들 기술이 없었고 철판을 잘라 사각으로 용접하는 것이 가장 쉬웠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수거된 소중한 원재료는 비포장도로를 출렁거리며 달린다. “똥” 국물을 도로에 질질 흘려가며 배 밭에 도착하면 농장주가 달려 나가 반가이 맞이하고 운전수는 레버를 제낀다. 농장주는 콸콸 쏟아져 내리는 인분을 보며 상품의 질을 판단 한다. 인분에도 질이 있다. 당시 부자들이 살던 부평동이나 대신동쪽에서 넘어온 제품은 영양가가 많아 인기였다. 하지만 현재김해국제공항에 있던 공군부대의 인분이나 부산지역의 군부대에서 나온 인분은 인기가 없었다. 부산인분은 제법 값을 치른다. 하지만 군인“똥”은 그냥 마지못해서 받아주었다. “똥”의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수집된 인분은 장기간 발효시간을 거친다. 인분은 오랫동안 발효가 되면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농장주는 이것에 손가락을 담궈 맛을 본다. 잘 숙성 되었다고 판단되면 인부들을 동원해 배나무 가장자리에 둥근 홈을 파고 풀을 베어 만든 퇴비와 함께 비료로 살포한다. 겨울에는 가지치기와 배나무 껍질을 긁어내기를 하고 이른 봄부터는 배 봉지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가지치기, 거름주기는 남자들이 하고 부녀자들은 모여 앉아 풀을 쑤고 작두로 자른 종이를 접은 후 풀칠을 하여 봉지를 만든다. 종이는 주로 미제 신문지나 잡지 같은 질이 좋은 종이를 사용했다.

어머니를 따라온 아이들은 밥을 얻어먹을 수 있으니 봉지 만드는 작업을 할 때면 배 밭에 아이들이 많이 뛰논다. 이렇게 뛰놀던 아이들이 인분 통에 빠지거나 심지어 빠져 죽는 일도 간간이 있었다. 일하는 엄마가 아이를 돌볼 수 없었기도 하지만, 인분 통 주변엔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었다. 인분 저장 통은 언뜻 보아서는 알아보기 어려울정도로 위장이 저절로 잘 되어있다. 우선 잡초가 주변에 잘 자라고 있고 배나무 낙엽과 묵은 배 봉지 종이가 어지러이 흩어져있을 뿐만 아니라, 인분위에 떠오른 화장실의 종이등과 바람에 날려 앉은 오물들이 꾸덕꾸덕 잘 말라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인분 저장 통을 쉽게 식별할 수가 없었다. 또한 작업의 용이성 때문에 지면과 거의 동일한 높이라 헛발을 딛기가 쉽다. “똥통”에 빠져 살아난 아이들은 찬물에 그대로 씻기고 “똥떡”을 해 먹여 양밥(액막이)을 해주었다.

배꽃(梨花)이 필 무렵이면 약간의 시간이 있다. 농장주 아제(아저씨의 경상도 사투리)는 이때 잠깐 휴식을 취한다. 배꽃이 필 무렵이면 달도 밝다(음력 3월 보름 경, 양력4월). 달밤에 보는 메밀꽃 밭이 하얀 소금을 뿌린 것 같다면, 배꽃 밭은 마치 하얀 눈이 내린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이 본다면 마치 팝콘을 뿌린 것 같다고 할 것 이다.

달이 밝은 밤 배꽃이 활짝 핀 배 밭을 바라보면 가히 환상적이다. 려말(麗末) 이조년(李兆年)의 다정가(多情歌)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데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를 읊으며 배 밭에 앉아 카바이트 소주(5~60년대 술)를 마시곤 하였다. 이런 낭만도 잠시,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열매 솎아내기가 시작되고 봉지 씌우기가 시작되면서 농장은 또다시 바빠진다.

이렇게 유명하던 구포의 배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나주, 안성, 평택 등 전라도와 경기지방으로 옮겨갔다. 땅 심이 깊지 않은 삼각주 지역보다 땅 심이 깊고 토질이 우수한 지방의 수확량과 품질을 따라갈 수가 없었고 급속한 산업화가 배농사의 단절을 불러왔다.

“똥”이 최고의 비료이고 농가의 자산이던 시절, 길가다 변이 마려워도 아무 곳에나 버리는 것이 아까워 참고 참아 집으로 뛰어와 일을 보던 그 시절, 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뒤로하고 인분 맛을 보며 숙성정도를 감으로 느꼈던 농부들과 배 밭에서 열심히 일했던 농부들, 일터에 딸려온 아이들을 똥통에 잃어가며 뼈 빠지게 일했던 가난했던 우리어머니들, 이런 분들의 눈물겨운 피땀이 있었기에 제사상에 과일을 올릴 수 있었고 우리의 과수농업도 발전 하였다.

FTA 체결로 외국의 과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요즈음 더욱 품질이 좋은 우리 과일을 개발해야 하겠지만 신토불이 우리 농산물을 좀 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가짐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배종진 | 향토사학자·문화재청 방문교사·예비역 포병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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