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우리군은 참으로 살림살이가 어려웠다. 군의 보급이나 복지도 생각해야했지만, 국민의 살림살이도 고려해야 했을 것이고 군인들의 복지에 앞서 북한 보다 열세한 무기를 먼저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어려운 환경 이었지만 군인들은 아무도 불평불만 하는 사람 없이 오로지 국가에 대한 충성심하나로 목숨을 내걸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 수단껏 부대를 운용하던 시절이었다.

군에서 보급되지 않는 물건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공식 보급품 외에 필요한 것이 많았다. 당시에는 총과 대포, 이를 운용하기위한 탄약을 비롯한 필수품은 보급이 되었지만,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각종 부자재나 소모품은 아주 적게 보급되거나, 아예 보급이 없어 알아서 구해야 했고, 부대 운영비가 조금씩 나오기는 했으나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엔 턱이 없었으며 병사들의 사기진작이나 복지에는 눈길을 돌릴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예를 들어 총과 이를 정비할 기름은 있어도 이를 닦을 수입포(기름걸래)는 없다. 대포는 있어도 포를 닦을 수입포가 없어, 급하면 병사들이 런닝 내의를 벗어 수입포로 사용했고 대포의 가신발톱을 묻을 자리를 파야할 공병삽과 곡괭이는 다 닳아 있었고, 대포의 반동(사격 후 뒤로 물러남)을 잡아줄 철주(쇠기둥)는 없었다. 온갖 물자가 다 귀했다. 갖가지 보조 재료와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거의 자체조달이었다. 각목은 산에서 나무를 잘라와 다듬어 만들고 못은 철조망의 가시부분을 군용스푼 손잡이 부분의 타원형 구멍에 끼워 분해한 다음 곧게 펴서 사용했다.

개인용 소모품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은 다 접어 두고라도 휴지(화장지)가 큰 문제였다. 당시는 종이가 무척 귀했다. 종이라곤 포대에 두세부씩 배달되는 전우신문과 편지뿐이다. 휴지는 기준이 일인당 30매인데 실제 수령해서 분배해 보면 20매정도 돌아간다. 휴지의 크기는 지금의 A4지의 절반보다 적은 A6지 정도의 재생용지이며 회갈색에 구멍이 숭숭 나있었다. 이런 종이는 지금은 절대 구할 수 없다. 한쪽 면이 그나마 미끈하여 편지지로도 사용 가능했다. 매일 한 장씩만 사용한다 해도 10일분이 부족하다. 화장실에 가면 한 장으로 될까? 매우 어려운 일이다. 휴지가 모자라니 풀잎이나 조약돌을 사용했고 급하면 나무토막에 새끼줄까지 이용했다. 오죽했으면 우표 한 장으로 뒤를 닦는 방법까지 나왔겠는가?

내무반 막사는 겨우내 무연탄을 황토와 섞어 사용하는 페치카를 떼었기에 온천지가 그을음으로 그슬려있어 봄이 되면 항상 도색을 해야 하는데 외부용 수성 페인트를 구할 수 없으니 인근의 철공소나 자전거점에서 카바이드(탄산칼슘CaC2로 아세틸렌이 발생한다) 용접후 나오는 카바이드 똥(찌꺼기)을 구해 와서 하얗게 발랐다. 건물 하단부 약30센치의 굽도리(벽면 하단의 까만 테두리)는 무연탄을 물에 이겨서 구둣솔로 새카맣게 발랐다. 이 무연탄은 훈련시 얼굴에 위장용 크림 대신으로 바르고 다녔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포대에는 행정을 담당하는 인사계(당시 고참 상사의 보직, 지금은 행정관이라 함)라는 부사관이 있었다. 최고참이 보직되어 포대의 모든 행정과 살림살이를 맡아 보았고 매우 노련하였다. 병사들은 이분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포대살림에 필요한 소모품은 이분이 종합하여 구해주는 데 주로 필요한 것이 페인트, 톱과 망치 같은 공구류, 삽과 낫, 곡괭이 같은 작업도구, 사이즈별 못, 철사, 비닐, 바늘과 실, 양초, 전구, 배터리, 노끈, 봉걸래, 빗자루 같은 청소 도구 등 다양하고 잡다한 품목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휴가병들과의 철저한 면담에 의해서 확보 된다. 짠밥 수(계급), 집안의 경제력, 휴가의 종류, 개인의 성격 등을 고려하여 아주 따뜻하게 은밀하며 부담이 가지 않도록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대 운영이 되지 않고 또 병사들이 자기들 스스로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니 거부할 수도 없었다. 피차 그런 환경이니 말썽의 여지도 없었다. 휴가병들은 이러한 물품들을 고향에서 구해오거나 버스터미널 인근의 만물상(군인들을 상대로 만물잡화를 구비한 가계)에서 사들고 귀대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원활한 보급지원과 사기진작 없이는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부대장은 보급되지 않는 물자의 확보와 병사들의 복지에 도움을 주고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XXX고지 후사 면에 자리한 부대는 점유면적이 매우 넓었다. 산 밑자락까지 6.25전부터 농사를 하던 다락 논이 있어 벼농사와 콩 농사를 하였다 포대별로 영농 병이 차출되어 모든 것을 열외하고 산속에서 농사만 지었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얼굴한번 본적이 없는 병사도 있었다. 다행히 그해 농사가 잘되어 가을추수 이후 포대별로 TV가 한 대씩 들어왔고 대대장은 인근부대 중 가장 먼저 TV를 설치했다고 자랑이 대단하였다. 어찌되었던 내무반생활은 크게 달라졌다 수시로 안테나를 돌려가며 전파를 잡아야 했지만 희미한 화면일지라도 저녁시간과 주말의 TV시청이 큰 기쁨이자 유일한 낙 이었다.

봄과 가을에는 어떤 경로(?)를 통하여 연결된 민간인들의 편의를 봐주는 사업도 있었는데 이 사업후의 이해관계는 알 수 없었다. 봄에는 갈(葛,칡)순을 꺽어 오는 작업을 했다. 갈등(葛藤)이란 말의 어원이 된 바로 그 칡넝쿨이다. 葛은 칡넝쿨을 말하고 藤은 등나무넝쿨을 말하는 데 두 넝쿨은 감아 오르는 방향이 서로 반대인데 우리가 흔히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거나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풀리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칡넝쿨은 당시 유행하던 갈포벽지(칡순이 3-4미터 정도 자랐을 때 껍질을 볏겨 종이위에 질감을 살려 입힘)를 만드는 원재료인데 인테리어용으로 많이 쓰였다. 이 작업은 이른 봄 잠깐밖에 하지 못한다. 칡 순이 다 자라면 상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 작업 할당을 받은 병력이 산으로 올라 일과가 끝날 무렵 내려오는 데 훌라후프 모양의 칡넝쿨을 한 짐씩 지고 와서는 민간 트럭에 가득실어 보냈다. 처음에는 칡 순의 용도를 모른 체 작업을 했고 한참 후에야 그 용도를 알았다.

가을에는 억새풀 채취 작업을 했다. 억새풀은 인삼밭의 그늘 막 지붕용으로 쓰이는 데 사람 키만큼 자란 억새풀은 볏짚보다 길이가 훨씬 길어 효율성이 높고 수명 또한 길어서 인삼밭 지붕으로 최적이었다. 당시 인삼 재배는 강화지역 등 경기서부에서 점차 동진하여 철원지역까지 번져 오고 있는 상태였고 아마 지금은 더욱 동진하여 홍천도 벗어났을 것이다. 인삼은 한번 심으면 수확까지 5-6년을 기다려야하고 한번 수확한 토지에서는 연작이 불가한 특수한 작물이라고 했다. 해질 무렵이면 산으로 올라간 병사들이 커다란 억새풀 등짐을 지고 하산하여 부대 후문에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실어준다. 그 짐이 부피가 크다보니 정말태산 같았다. 이런 작업들은 부대 운용에 이익이 된 것인지 아니면 특정인들만 이득을 본 것 인지는 알 수 없다.

포대는 포대대로 살림이가 어려웠고 대대는 대대대로 부대 운영이 어려웠다. 할 것은 많고 보급은 원활하지 못했으며 더구나 보급이 안되는 품목이 많아 지휘관들은 정말 힘들었다. “반쯤 自給自足 해야 했다” 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시선과 잣대로 보면 엄청난 부조리이겠지만 당시의 현실은 이랬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들이었지만 국민의 4대 의무중 하나인 國防의義務를 다하겠다고, 3년이란 세월을 국가에 바친 당시의 군복무자들의 피땀 어린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과 우리 군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배종진 | 향토사학자·문화재청 방문교사·예비역 포병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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