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대 막사의 구조는 행정반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긴 마루형인 2개의 내무반(지금은 생활관이라 부른다)이 있다. 내무반 한편에는 또 알 수없는 보관함이 있었는데 바로 ‘일계장 피복함’이라는 것이었다. 피복은 의류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옷이 들어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 지급하여 관물대(보급품을 정돈하여 보관하는 곳)에 있어야할 전투복을 10여벌 모아서 걸어두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거기에 비교적 상태가 좋은 전투화(군화)도 10여족 보관 되어 있었다. 왜 옷과 군화를 깨끗하게 손질하여 준비해 두었을까? 이 옷과 군화의 용도는 휴가 시 돌려가며 입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옷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군화는 발 사이즈에 따라 어느 정도 맞아야 하거늘 어떻게 신고 다닐까? 군대는 이런 말들이 있다 옷이 안 맞으면 옷에 몸을 맞추고 신이 발에 안 맞으면 발을 신에 맞춰 신는 다고. 참 편리한 말이다.

왜 ‘일계’란 용어를 사용 되었는지. 일제의 잔재 용어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日計라고 짐작 된다. 당시는 보급사정이 매우 좋지 않아 몇 벌의 옷에 불과하지만 공용물건이니 매일 점검을 하고 수량을 파악해 두어야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여간 휴가 때는 단정한 차림으로 신고를 하고 고향으로 떠난다. 휴가병은 일계장 피복을 골라 자기 명찰(이름표)을 밤새 바느질하여 붙이고 반합뚜껑으로 반질반질하게 다림질하고 칼 같은 주름을 잡아서 옷장에 걸어둔다. 옷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군화는 아예 보급을 기대할 수 없었다. 모두 통일화를 신었고 장교인 나도 교육생 시절에는 통일화를 신고 훈련을 받았었다. 통일화의 생김새는 고무밑창이 두껍고 발등 부분은 면으로 되어 끈으로 조이는 등산화 형태 비슷한데, 가죽군화를 전군에 보급할 형편이 안되니 고무로 만든 대용품을 만들어 통일을 염원하는 뜻의 통일화란 이름으로 보급했던 것이다. 통일화의 가장 큰 특징은 땀의 배출이 잘 안되어 엄청난 향수 냄새가 난다는 것인데 이것이 한 내무반에 60여족씩 침상 밑에 있다고 상상 해보라. 하여간 특급 방향제임에는 틀림없었고 악취와 무좀이 만연했다.

당시는 보급품사정이 너무 열악하고 더구나 물 빠진(염색이 잘 안된) 군복이 보급되어 군인들이 희멀건 색깔의 군복을 입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시절이다. 더구나 전방이지만 약간 후방지역에 위치한 포병부대의 보급 우선순위는 항상 맨 뒤여서 더욱 보급 사정이 나빴다. 그런데 고참 병장들과 하사들은 하나같이 군화를 신고 있고 전투복도 비교적 상태가 좋은 것을 입고 있었는데 전투복 깃에는 계급장(장교)을 부착했던 바느질 자국이 선명하고 아니면 주머니위의 계급장(하사관) 부착 자욱이 선명하다. “이 옷 어디서 났나?”하면 “전역하시는 분이 주고 갔습니다”라고 한다. 전역장교와 부사관이 그렇게 많았을까.

군대는 회식이 많다. 왜냐하면 전입전출로 오고가는 사람이 많고 처음에는 계급관계로 만나지만 한솥밥을 먹고 같이 뒹굴다 보면 전우애가 생겨 헤어질 때는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를 못 잊어 하고 이별을 아쉬워하며 섭섭함도 털고 간다. 그래서 전방 골짜기지만 식당을 겸한 술집이 많다. 또한 특별히 즐기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없는 시절이고 보니 간부들의 발걸음은 해가 떨어지면 자동으로 그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월급을 타는 날과 이후 일주일간은 온 골짜기에 각급 부대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술집에서 또 놀란 사실은 모두 군화를 신은 체 방안에서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비상이 자주 걸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상이 걸리면 연락병이 뛰어와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다니고 술집 방문도열어보고 “00부대비상”이라고 소리 치고 다녔다. 전화기가 없는 그 시절 비상소집은 이런 방식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군화를 신은 체 방에 앉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신발을 벗어두고 방에 들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문밖에는 각급 부대에서 야음을 틈타 군화사냥을 나온 용사들이 기회만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울타리도 제대로 없는 인근 농가에서 영외거주를 하는 간부들도 해가지면 세탁물을 반드시 걷어 들여야 하고 군화를 방안 머리맡에 두고 자야했던 것이 당시의 현실 이었다. 나도 어느 날 현관문이 따로 있어 안전하다고 생각한 식당에서 신발을 벗어두고 방에 들었다가 나올 때 군화가 없어져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토족(土足)으로 방에 앉는다는 것이 적절하지 못한 행동에는 틀림없지만 이것도 생존 방법의 하나였으리라.

여름철에도 창문을 열어둔 체 창가에 옷을 걸어두고 자다가는 누군가에 의해서 계급장 붙은 옷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심지어 마을의 유일한 세탁소에서도 맡겨둔 옷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 옷과 신발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간부들은 일정 금액이 정해진 쿠폰으로 피복(전투복, 우의, 군화, 장갑, 내의 등)을 구매하는데 초급 장교들은 제대로 사기도 어렵다. 병참 부대의 피복 판매차량이 날짜를 정해두고 각급 부대를 순회하면서 판매를 하는데 그 차량을 만나기도 어렵지만 쿠폰 자체가 많이 손질당한 상태에서 개인에게 지급 된다. 대대 군수과에서 보안대, 헌병대등 에서 달라고 해서 떼어주고 정작 당사자의 손에는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 전달된다. 

피복 중에 모두가 가장 탐내는 것은 장교우의인데 이것이 버버리코트 비슷하게 만들어져 보급되어 당시 패션으로 치면 굉장히 세련된 복장이었다. 사병 우의는 판쵸 우의였다.  비오는 날은 이 옷을 입으면 신분이 확실히 구분 된다. 그래서 일반 고참병들도 이 우의는 절대 넘보지 않는데 유일하게 이를 입고 다니는 사병들이 있으니 바로 보안부대 병사와 헌병대 사병들이다 장교용 우의 쿠폰이 어디로 갔겠는가? 적어도 그들은 자신과 장교의 신분이 동급이다라고 생각했을까? 하긴 당시 그런 보직의 병사들은 지금으로 치면 부유층 자제이거나 고위층의 빽을 가진 자제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사실 젊은 장교들은 비오는 날 우의를 잘 입지 않았고 당당하게 비를 맞고 다녔다. 훈련을 그렇게 받았고 젊어서 그랬는지 비를 흠뻑 맞고도 하나도 굴함이 없었으며 그것이 용감하다고도  생각했다. 
 
수많은 부조리를 알게 되었지만, 나 자신도 적응하기 어려운 시점이니 당시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이러한 감정들은 나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초급 장교들이 가졌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고급장교가 되면 이런 일들은 반드시 근절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군은 시작되었다. 

배종진 | 향토사학자·문화재청 방문교사·예비역 포병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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