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영화 명량이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바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이자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남해노량의 관음포와 이락사(李落祠)를 답사하는 문화 탐방이 있었고, 이에 동참하였다. 답사 길을 지나며 문득 아버님과의 마지막 여행의 추억이 생각나 그때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몹시도 춥던 그해 겨울 창졸간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 가을 추석전날 차례상을 준비하던 중 곁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어! 어! 하시며 이상해지신다. 온 식구가 깜짝 놀라 지켜보니 언어장애와 구안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뇌졸중이었다. 급히 큰 병원의 응급실로 모시고 치료를 하여 다행히 언어도 돌아오고 입도 돌아왔다. 그러나 후유증은 남았고 아버지의 기나긴 투병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

이후로 아버지는 일체 문밖을 나가시지 않고 누워만 계시게 되었고, 보행이 불편하신데다 말수도 거의 없어 지셨다. 특히 아랫부분이 전혀 통제가 되지 않았다. 의사와 상담한 결과 중풍의 후유증은 여러 가지 유형을 보인다는데 아버지는 좀 특이한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식사도 혼자 하실 수가 없고 떠먹여 드려야했는데 나는 정성을 다해서 아버지를 모시고 회복되기를 기대하며 약도 시간 맞추어 먹여드리고 팔다리도 주물어드리면서 최선을 다했다. 

주변사람들이 모두 요양병원으로 모시라고 말했지만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날 낳아주신 아버지를 남의 손에 맡겨 간병하게 하지 않겠다는 것, 아버지의 지저분한 뒤처리를 남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 덕에 내가 나고 내 자식이 생겼거늘 부모님의 몸이 이렇다고 내가 간병하지 않고 편하게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만 같아 결코 그리 할 수가 없었다.

170여년 전 우리 마을의 효자 김 석숭은 어머니가 병들자 분(糞)을 입에 넣어 감정해 병세를 알아보고 임종 전에는 손가락을 끊어서 자신의 피를 마시게 하여 7일을 더 연명 하도록 한 것이 알려져 나라에서 정려비(旌閭碑)를 세워 그 효성을 기리도록 했었다.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해 모셔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이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간병하기로 했고 정말 모든 것을 아버지께 올인하여 간병 하는 데 노력을 다하였다 어머니를 일찍 잃었으니 아버지는 오래 모시고 싶은 내 희망도 있었기에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과는 다르게 진행되어갔고 힘든 일이 많이 생겼다

이듬해 초여름 어느 날에는 아침식사를 드시고 뒷일을 보셨는데 뒤처리한 뭉치를 마당에 던져두고 목욕을 시켜드리고 방에 모신 후 땀범벅이 된 내 몸을 씻고 나오니, 아뿔싸 또 일이 벌어져있었다. 반복해서 씻겨드리고 요를 갈아드린 다음 다시 씻고 나오니 또 반복되어 있었다. 아침에만 세 번이었다. 이때는 참으로 갑갑하고 난감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너무 답답하여 처음으로 아버지이~ 하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고 말았으며 내 스스로도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참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기진맥진 수습을 하고 마당으로 나오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온 마당이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그 무렵 얼음이(어미개)가 처음으로 새끼를 낳아 하얀 강아지 3마리가 젖을 땔 때쯤 되었는데 이 예쁜 강아지들이 모두 뻗어 있었다. 놀라서 만져보니 죽지는 않았는데 눈이 허옇고 축 쳐진다. 아마 돌아다니다 쥐약 같은 독극물을 먹었나싶어 얼른 비눗물을 만들어 마시게 해보았지만 넘어가지도 않는다. 포기해버렸다. 죽어봐야 강아지다. 하고 큰 마음먹고 이부자리와 속옷 등을 세탁하여 밖으로 나오니 우습게도 강아지들이 살아서 뛰어다니고 있다. 독한 것을  핥아먹고 잠시 동안 혼절했던 모양이다. 이런 난리를 다 정리하고 나니 점심때가 훨씬 지나있었다. 이제 또 점심 식사를 올려야 할 시간...

이런 생활은 2년여 동안 계속되었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되었다.가정 문제와 내 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점. 그중에서도 동생들의 비난은 도를 넘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효성이 지극한 동생들은 왜 더 잘 모시지 못하는 것이냐는 것인데 다행히 이웃에 고모님과 사촌이 살고 있어 자주 들려 현실을 지켜보았기에 많은 위안이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해 한여름 에어컨을 켜두어도 집은 몹시도 더웠고 아버지도 나도 지쳐 가고 있을 때 아버지께 우리같이 여행을 한번 다녀오시지요. 했더니 현관문 밖에도 나가지 않으시던 아버지께서 쾌히 그러자고하신다. 이렇게 아버지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은 시작되었다. 숲과 물이 좋고 시원한 하동 쌍계사 입구의 안면이 있던 민박집으로 향했고 다행히 주인 내외분이 사람이 좋아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자기내들이 거주하려고 새로 지은 황토방을 내어준다. 그리고 삼시세끼 밥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여주신다. 아버지가 회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서는 사람을 섬진강으로 내려 보내 쏘가리 등 귀한 회감을 구해와 아버님께 대접을 해주시니 고맙기 그지없고, 이는 돈을 바라고 하는 일도 아니니 더울 감사하고 못 잊을 분들이다.

아버지가 그늘 밑 평상에서 쉬고 계시는 동안 나는 불일폭포를 향해서 등산길을 내달리곤 했다. 그리고 천길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를 맞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산을 내려왔다. 밤에는 대답 없는 아버지와 혼자만의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아버지 어릴 땐 어떻게 자랐습니까? 할머니의 도깨비 이야기는 정말입니까? 무섭지는 않았나요? 할아버지께서 일본사람의 소작농이 되었을 때 왜놈들이 밉지 않았나요? 농업학교를 합격하고도 재산이 없다고 입학을 못해 돌아오는 길에 길가의 전봇대를 주먹으로 치며 울었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분하셨어요. 18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어 태평양 전쟁을 겪고 해방이 될 때까지 얼마나 고초를 겪었습니까? 그때 이야기 한번 해보세요... 아버지는 어쩌다 한번 씩 듣는지 마는지 모르지만 음... 음... 하는 소리만 내었지만 나는 아버지와 못다 한 이야기를 계곡 물소리를 벗하여 엿새 밤을 나누었고,  모기장 밖으로 보이는 손에 잡힐 것 같은 반짝이는 별들과 눈 맞춤을 하였다.

이렇게 엿새를 보내자 아버지는 이번엔 남해 보리암으로 가보고 싶다고 하신다. 보리암은 차에 내려서 한참을 걸어야 하는 데 난감했지만 일단 출발하기로 하고 아쉬워하는 민박집 주인내외분과 작별을 하고 길을 나섰다. 막상 남해로 들어서니 날은 덥고 지리산 산속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결국 보리암을 포기하고 이락사에서 휴식한 다음 길목의 가까운 화방사에 들렸고 지친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여 아버지와의 꿈같은 여정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비록 일주일간의 짧고 환자를 모시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두 번 다시 만들 수없는 참으로 뜻있는 여행 이었다.

이후 집사람이 큰 수술을 하게 되는 등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결국은 만 3년밖에 모시지 못하고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는 불효를 하고 말았고 병원에 계신 동안 처음에는 매일 문병을 다녔으나 나중에는 일주일 심지어 10일 만에 찾아 뵌 적도 있으니 처음의 내 마음과 같지 않아 스스로 놀라 크게 후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7년을 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아버지도 어머니 곁으로 떠나셨다. 적잖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버지와의 일방적인 대화를 나누었던 그날 밤들이 그리고 집밖에서 같이 보낸 그날들이 아직도 내 가슴속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으로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배종진 | 향토사학자·문화재청 방문교사·예비역 포병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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