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였던 아버지 덕에 어릴 땐 줄곧 학교 사택에서만 살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지금의 가락으로 이사를 내려 왔다. 가락은 전형적인 시골 농촌 이었고 집 가까이 5일장이 서는 곳이었다.

집은 비포장 도로 길가 집 이었지만 기와를 얹은 솟을지붕에 빗장을 질러 잠그는 대문이 있고 본체도 상당히 큰 기와집으로 근동 에서는 제법 부잣집 같아 보였다, 이집에서 나는 십리 밖의 읍내 중학교에 간간이 오는 빨간 버스를 타거나 아예 걸어서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이집으로 이사를 오고난 뒤부터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해오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상한 손님이 항상 마루에 걸터앉아 음식과 주안상을 받고 있었고 어떤 때는 높은 축담에 걸터앉아 개다리 소반의 음식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학교 다녀 왔슴니다~!” 하면서 대문을 들어서면 어머니께서는 부엌이나 우물가에서 일을 하시다 이제오니 하고 반가워하시며 손님께 인사하라 하신다. 인사 후 처음 보는 분이라 누구냐고 물어 보면 “응” 일가다. 라고 하시기에 어린 나는 우리 일가가 참 많구나 라는 생각만 하였다. 그중에는 한쪽 팔이 없는 사람 , 목발이나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사람도 더러 있었고 자루나 깡통 같은 휴대품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스님들도 가끔씩 볼 수 있었는데 ‘이분들도 일가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냥 열심히 인사를 하였고 그렇게 일 년 가까이 지났다.

이듬해부터는 논농사도 지었는데 낮 모르는 일가들은 매일 찾아  오고 안면이 있는 일가들도 가끔 오시는데 어머니께서는 이분들이 돌아갈 때마다 농사지은 쌀 됫박을 자루나 보자기에 담아주셨다.

내가 손님에 대한 의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중학3학년이 될 무렵인  설을 지나고 부터인데 대접받는 손님이 신발을 벗고 마루위로는 절대 올라가서 앉지 않는다는 것과 옷차림이 어린 내가 봐도 너무 남루하고 용의(위생상태)는 말할 수 없이 지저분하다는 것, 인사를 해도 대개의 손님이 그냥 ‘응~ 응~’ 하는 식으로 인사를 받고 대문을 나갈 때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같은 사람도 어머님께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간다는 점, 호랑이 선생으로 유명하신 무서운 아버지가 집에 계실때는 손님이 얼씬도 못한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 하면서부터였다.

몹시도 춥던 어느 날. 정중하게 인사드린 일가들이 시장 구석 바닥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이들이 어려웠던 시절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거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크게 실망 하고 자존심이 상하여 어느 날 어머님께 따졌다.

“어머니! 아니 거지한테 일가라며 인사 시키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하면서 따졌다.
 울 어머니는 한동안 미소만 머금고 계시다가 “진아, 그랬나? 맘 상했니?”

하시고는 “걸뱅이도 사람이다, 얼마나 불쌍하니? 우리 집서 못 얻어먹으면 하루 종일 굶을 수 도 있는데 어찌 먹을 걸 안주고 그냥 보내겠니? 없는 사람 도우면 나중에 다 복 받는 다, 내가 못 받으면 네가 받고 네가 못 받으면 네 새끼가 받는 기다, 복은 지은대로 죄도 지은대로 가는 그란다. 맘 상하지 말거라 그라고 인사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손해 갈 것 없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는 무조건 인사 하거라........”

당시엔 어린 마음이라 어머님 말씀이 전혀 내키지도 않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냥 흘러듣고 말았다,

이렇게 어머니와 일 년을 더 보내고 고등학교는 부산으로 유학을 떠났고, 졸업 후 바로 사관학교를 가는 바람에 사랑 방 손님 아닌 거지 손님에게 그 뒤로 인사를 올릴 기회는 없었지만, 아마도 우리 집에는 국가에서 이들을 위한 구호 대책을 세울 때까지 그분들이 수없이 방문했을 것이고 어머닌 부지런히 개다리소반을 차렸으리라,

 세월이 흘러 효도할 틈도 없이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일찍이 먼 길을 떠나셨고 호랑이 같던 아버님마저 여위고난 지금 나 자신이 어느 듯 환갑을 넘긴 나이가되어 어릴 때 살던 고향 집에 돌아와서 깊어가는 겨울 밤 부엉이 우는 소리 들으며 지난날을 회상 해보니 어머님과 거지 손님들이 생각나고 걸인들에게 공손히 인사드리던 내 모습이 아련한 추억으로 그려진다.

그렇게 많이 베푸셨건만 왜 일찍 먼 길 가셨냐고 묻고 싶은 어머니는 꿈결 속에서도 뵙기 어렵다. 어머니, 생각만 해도 젖어드는 눈시울에 가슴뭉클 해지면서 몇 말씀 올리고 싶다.

어머니!

어머님께서 베풀어 지어놓은 그 복(福)! 제가 다 받았기에 어려움 없이 잘살고 있는것 아닐까요?
또한, 어머님 덕분에 자식들도 잘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닐까요?

이제 세상이 살기 좋아져 걸인들이 집에 밥 동냥을 하러 오지는 않지만, 어머님의 베푸심이 집안의 전통이 되었는지 어머님의 며느리도 복지관에 밥 봉사를 나가면서 즐거워하고 있으니 어머님 말씀대로라면 제 아이들이 복을 받거나 아니면 손자들이 받겠지요.

어머니께서 하셨던 그 말씀을 옛 성현들은 이렇게 적어 놓으셨더군요.

“수성숙덕 이급자손(修成淑德 施及子孫 ; 좋은 덕을 닦아 놓으면 그 덕이 자손에게 이어 진다.)”
어머니, 이 말을 가훈(家訓)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의 손때가 묻었던 개다리소반은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답니다.

배종진 | 향토사학자·문화재청 방문교사·예비역 포병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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