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영화 ‘기적’을 보고 감명을 받아 군인이 된다면 영화의 주인공같이 멋진 제복을 입고 용감하게 싸우는 장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월남전이 한창인 때라 월남에 파병되어 베트콩과 한번 싸워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어린 시절 치기에 불과했던 생각이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용기는 대단했던 것 같다. 월남전이 월남의 패망으로 종전되기 직전해인 1974년 장교로 임관하여 첫 부임지인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문혜리에 주둔한 포병대대로 부임명령을 받게 되었고, 1975년 1월1일 의정부 101보충대에서 우리를 인솔하러온 쓰리쿼터 트럭에 동기생 3명과 함께 몸을 실었다. 트럭이 포천을 지나자 온천지는 하얀 눈밭으로 변해있었고 비포장도로는 꽁꽁 얼어붙어 ‘쟈갈, 쟈갈’하는 체인소리가 요란했다.

  한 시간여를 넘게 달리다 운천리 북방에서 잠깐 차를 세우고 휴식을 했는데 호로도 없는 적재함에 앉아 얼마나 추위에 떨었는지 모른다. 차에서 내려 화장실을 찾아보았지만 없다 명색이 장교인데 길가에 실례를 할 수 없는 지라 민가의 화장실을 찾았는데 여기저기 드문드문 흩어져있는 농가는 눈 속에 묻혀 인기척이 없고 개 짖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주인은 불러도 대답이 없고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가마니로 막은 화장실 같은 곳이 있어 몸을 웅크리고 들어서니 잿간 이었다. 오물통은 보이지 않고 잿더미 앞에 적당한 간격의 평평한 돌2개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앞쪽에는 미제깡통에 볏집 하단부의 부드러운 짚이 소복이 담겨있었다. 흙벽에는 동짓날 팥죽을 쑬 때 눌지 말라고 저어대던 주걱 같은 것이 기대어있는데 분명히 팥죽이 시커멓게 말라붙어 있었다. 일단 사람도 없고 볼일도 급했기에 댓돌위에 올라서서 잿더미에 참았던 노란 시럽을 뿌리고 나왔다.

  그것 참 이상했다. 분명 화장실인 것 같은데 뭔가가 없다. 얼마 뒤에 알았지만 강원도 농가에는 화장실에 오물통이 없으며, 잿더미 속에 볼일 본 결과물을 주걱을 이용해서 싹 던져 넣는다.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물통이 없는 것은 혹독한 추위에 모든 것이 꽁꽁 얼기 때문에 생긴 이곳 사람들만의 지혜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한 볏집의 사용처도... 알 수 있었다. 

  트럭이 북쪽으로 한없이 달려 목적지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사방천지를 식별할 수가 없었다. 안내받은 BOQ(독신 장교 숙소)란 곳에 짐을 풀었는데 이곳 참 가관이다. 방안에서 블록 틈새가 쩍쩍 벌어져 밖이 다 보이는 창고 같은 방이다 냉기는 그대로 들어오고 지급받은 것은 모포 3장과 야전 침대하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랄까. 저녁도 굶고 시간이 지날수록 추위는 심해졌다. 결국 가지고간 피복을 모두 겹쳐 입고 군화를 신고 방한모까지 뒤집어 쓴 다음 셋이서 침대를 붙이고 부둥켜  안은 체 생애 처음의 혹독한 추위를 맛보며 선잠을 청하였다. 1975년 1월1일, 우리는 이렇게 잊지 못할  장교로서 근무할 부대의 첫날밤을 보냈으며 연탄난로를 구할 때까지 근 보름간을 이렇게 가슴까지 떨리는 무섭도록 추운 철원의 밤을 보내야 했다. 이곳의 겨울은 영하20도에서 30도가 기본이다.

  대대장 신고 후 알파 포대로 배치를 받았는데 포대장으로부터 부여받은 첫 임무가 화장실 청소감독이었다. 준비된 것은 병사4명과 들것 하나 그리고 야전도끼 2자루와 공병삽 이었다 화장실 청소에 도끼라니? 화장실 문을 열어본 순간 정말 놀랐다 황금탑이 무릎높이 이상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타지마할의 양파모양 탑 비슷 하달까? 그리고 첨탑 부분은 거꾸로 자란 고드름과 같다 잘못 앉았다가는 큰 낭패를 보리라 병사들이 열심히 도끼질을 교대로 해대었지만 그 강도가 매우 단단하여 작업이 쉽지 않다. 작은 가루파편들이 비상했지만 날씨가 워낙 추우니 옷에 붙어도 털면 쉽게 떨어져 나간다. 이놈들을 쓸어 담아 인근 야지에 버리는 것인데 오전 일과시간 내에 끝이 나질 않는다. 병력은 120명인데, 화장실은 6칸, 한 칸을 20명이 사용해야한다는 계산인데 기상 후 동일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병사들이 화장실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문제였다.

  두 번째 부여받은 임무는 식사시간 마다 사병식당으로 가서 급양감독을 하는 것이었다. 말이 급양감독이지 밥을 많이 먹는 병사가 없도록 통제하여 밥이 모자라지 않도록 하라는 배식감독인데 배식을 할 때 밥과 국을 퍼는 병사를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고 밥을 눌러서 못 담게 하는 것 이었다. 사병들의 식기는 작은 바가지만한 알루미늄 밥공기, 국그릇 각 한 개와 스푼 하나였다. 밥은 쌀3에 보리7의 새까만 꽁보리밥이다. 국은 항상 콩나물국 또는 멀건 생양(기름에 튀긴 두부)된장국인데 콩나물의 길이가 한 뼘을 넘어 국그릇에 가로로 척 걸쳐 진다. 밥은 항상 모자랐고 이러다보니 푸슬푸슬 하게 밥을 퍼야 하는 데 고참들은 배식병에게 온갖 신호를 보낸다. 식기 두드리는 소리, 기침소리 등 나름대로 신호가 있었다. 침묵을 시키면 발동작이다. 식관 앞에서 발모양이 달라진다. 고개 숙인 배식병이 발을 보고 알아서 밥을 눌러 담는 것이다. 아무리 통제를 잘해도 보초병이나 화포 점호를 마치고 내려와 뒷줄을 서는 병사는 밥을 못 먹는 일이 생겼고 빈 그릇을 들고 돌아서는 병사들을 보는 것은 정이 많은 나에게는 가슴이 찢어  지는 고통 이었다.

  세 번째 부여받은 임무는 세탁물을 삶는 일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일요일 마다 포반 단위로 돌아가면서 속옷과 내의를 가마솥에 삶아 페빼치카에 건조시키는 작업인데 열외 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포대 막사 앞에는 ‘방화사’와 ‘살슬통’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방화사’는 알지만 ‘살슬통’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으니 열어 볼 수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자니 장교가 그것도 몰라? 할 것 같아 체면 때문에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세탁 감독 후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일요일에는 자유시간과 개인 정비 시간이 있었다. 정비시간에 이 살슬통을 열어 준비된 작은 주머니에 하얀 가루를 담아 양쪽 겨드랑이 밑과 사타구니 밑 내의에 매달게 했는데 이 주머니에 담긴 하얀 가루는 바로 DDT였다. 살슬은 殺蝨, 즉 이를 잡는 DDT를 보관하는 독극물 보관통 이었다.

  석식이 끝나고 나면 즐길 거리가 없었다. TV도 없으니 희미한 전깃불 아래서 매일 장기 자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소총과 개인 장구 그리고 피복을 정비 하는데 주로 양말을 깁거나 이와 빈대 등을 잡는다. 내무반 생활을 같이 한 나도 온몸이 가려워 BOQ로 내려와 옷을 벗어보니 이가 옮아 속옷에 허연 놈들이 득실하다 왼손 엄지손톱위에 올려놓고 오른 손톱으로 누르니 툭 툭 하는 소리가 꽤 크다. 어떤 놈은 피를 머금고 터진다. 이 잡는 재미까지 느껴질 정도다. 세탁 할 데가 없는 속옷은 돌돌 말아서 버리고 말았다. 몇 벌을 그렇게 버렸는지 모른다. 이때 생각한 아이디어가 일회용 속옷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몇 년 뒤 누가 개발했다가 사업성이 없어 실패 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한 장교의 길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첫 부임지 생활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조금씩 현실 환경에 적응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강추위 속에서 화장실을 사용 하지 못한 병사가 어떻게 적응 해 가는지? 밥을 굶고 있는 병사가 어떻게 생존 하는지? 왜 밥이 항상 모자라고 부식이 없었는지? 하는 이유를 머지않아 알게 되었지만 나 자신의 생존도 보장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남에게 도움을 주거나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현실에 빨리 적응 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 이었다. 이것이 1970년대의 우리 군의 실상이었다. 

배종진 | 향토사학자·문화재청 방문교사·예비역 포병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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