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좋은 날도 찾아온다고 했던가? 정신없이 부대적응을 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추운겨울이 지나고 전방에도 봄은 찾아왔다. 해빙기가 되면 부대는 진지 보수공사를 대대적으로 한다. 포상(砲床, 대포가 있는 곳)도 새로 손보고, 무너진 교통호도 정비해야 하며, 화포와 장비들도 손질하고, 동계 기간 사용했던 월동용 장비와 도구들도 기름칠하여 저장 한다.

아울러 훈련도 시작되면서 포대ATT(포대시험)이란 전투력 측정을 받아야 한다. 포대의 전투력과 포대장의 전투지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인데 개인화기 사격부터 주특기교육상태, 화포사격까지 전 분야를 측정한다. 하지만 진지공사 등으로 실제로는 훈련시간이 많이 부족하다. 이 시험에 불합격하면 재시험을 받게 되고 또 불합격하면 하면 보직해임까지 당한다. 포대장들은 명예를 위하여 온힘을 다하여 이를 준비 한다. 숙달된 병사가 전역하여 양성요원이 경험이 없어 취약한 분야에는 타포대의 우수한 병사들을 지원 받아 수단껏 시험 준비를 하기도 했다.

나는 관측장교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삼부연 폭포가 있는 용화동 사격장의 훈련OP(observation post, 전방관측소)에서 한 달간 텐트생활을 하며 주야로 포탄을 유도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여기는 훈련장이라 수많은 부대의 관측장교가 모였고, 사격량도 매우 많았다. 처음에는 포탄이 머리위로 쓩~ 하는 바람소리를 내며 지날 때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이어 수초 후 작열하는 포탄의 불꽃과 흙먼지는 어느새 담뱃불과 담배연기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섬광 후 들려오는 폭발음은 불꽃놀이의 폭죽이 터지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야간사격 시 시한신관을 사용하여 지상20미터 공중에서 폭발시키는 포탄유도는 불꽃놀이와 꼭 같았다. 환한 불빛을 내뿜는 조명탄 사격은 낭만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간혹 실탄이 되어 퍽 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거나 불발탄이 될 때는 불안하기도 했지만 비싼 포탄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포대시험은 비교적 좋은 성적으로 합격을 했다. 이후 나는 대대의 전방 상주OP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나의 군대생활을 통틀어 가장 여유롭고 대우받았던 시간으로 기억 된다. 전임자는 무려 4개월을 이곳에서 근무했는데 살이 포동포동 찌고 OP에서 내려올 때는 야전점퍼 주머니에 돈이 가득했다. 월급을 받아도 쓸 곳이 없고 잡다하게 공제되는 것이 없으니 제법 돈을 모아서 내려오곤 했다. 군사분계선에 가까운 산꼭대기에 위치한 000 OP는 좌로6.25때 격전지로 유명한 00고지로부터 우로는 김일성이 국군장교 군번 한 트럭과도 안 바꾼다고 말했다는 00산까지가 관측구역이었으며, 전방은 북한의 광활한 00고원이었다. 흔히 말하는 ‘철의 삼각지’ 중앙부분이며 철원에서 원산까지 이어지는 추가령 지구대의 한부분이다.

제3땅굴도 꽤 가까이 있었는데, 그 해인 75년 3월에 발견이 되었고 수년 뒤에 개방되었다. 발굴 작업 중 북괴가 설치해둔 부비트랩에 국군 7명이 순직한 안타까운 곳이기도 하다. 살벌하고 무서운 격전지였던 이곳이 지금은 6.25전 북괴가 사용하던 노동당 당사 건물과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월정리 역, 그리고 제3땅굴을 연계한 안보 관광지로 유명하다고 하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당시OP 근무는 나와 사병 3명이었고 이들과 돌아가며 24시간 벙커 근무를 하고 낮에는 쉬었다. 여기에 이 OP를 경계해주는 보병 0개 분대에 소대장이 0명이 상주했다. 전방상황은 특이한 동향이 포착되지 않았고 가끔씩 오발사고인지 총성이 들릴 때가 있었다. 북한의 선전촌에는 밤이고 낮이고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으며 괴뢰기인 인공기만 나부끼고 있었다. 밤에는 월정리역의 연장선이던 평강역 쪽에서 열차의 기적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도 하고 대남방송 소리와 수많은 삐라가 날아와 이곳이 최전방이구나 하고 느낄 뿐 이었다. 무전 교신시간이 되어 주파수를 변경해가며 교신하다보면 북괴군의 무선교신이 잡힐 때도 있는데 억양과 용어가 완전히 달라 즉시 알아챌 수 가있었고 머리끝이 쭈뼛 할 때도 있었다. 이들과 교신하면 적국과 교신 한 것이 되어 큰 사고가 된다.

OP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적의 표적이 되고, 철수를 할 여유가 없어 죽음을 가장 가까이하는 천국이기도 했지만, 높은 고지에 위치하여 하늘이 가깝고 원시 그대로의 자연환경이 너무 좋은데다 더욱 즐거운 것은 병사들이 삼시세끼를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데다, 산꼭대기라 물이 없어 그 귀한 물을 길어다 세숫물까지 준비해주고 세탁물까지 가져다 세탁해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었겠는가? 사병들도 마찬가지다. 자대에서의 모든 고달픔을 잊고 몇 명 안 되는 전우들끼리 차례를 정해 하산하여 부식을 수령하고, 밥 짓고, 물 길어오는 일이 하루일과였고, 보초는 벙커 외곽한곳만 지키면 되니 큰 부담도 없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모든 고달픔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으리라. 점검이나 순찰도 거의 불가능 한곳이 이곳이었다. 대대에서 직선거리는 10여키로밖에 되지 않았지만 꼬불꼬불 비포장 산길을 돌아오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특히 하차해서 40분 이상을 산을 타고 올라야 했다. 찻길은 먼지가 일어 움직임이 관찰되며 부대에서도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는 나설 수 없는 길이니 정해진 일정이 아니면 오기가 어려운 곳이다. 더구나 해가 떨어지면 아무도 움직일 수가 없는 곳이라 무전기와 전화선만이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다.

이곳에서 며칠 동안 지형을 숙지하고 화력계획을 익히고 나니 특별히 할 것도 없어 호롱불 아래서 책도 읽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희미하게 잡히는 방송을 듣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라디오 드라마는 ‘꽃순이를 아시나요?’ 라는 드라마였으며 주제가도 부를 수 있다. 이렇게 평화스럽고 천국 같은 생활도 잠시, 한달 겨우 근무하고는 가을 대대 ATT에 측지장교가 없다고 해서 측지장교 명을 받고 하산하고 말았다. 나의보직은 관측장교였지만 남의보직경력을 쌓아주는 일이었다. 이후로도 초급장교시절은 제대로 내 보직을 하지 못했다. 상위보직이라며 항상 남의보직을 채워주는데 이용되었고, 정작 내가 필요한 보직은 시기를 못 맞추어 애로가 많았다. 대대장이 바뀔 때마다 대대시험 한번만 더 받아주고 가라는 강요를 못 이겨 철원에서만 무려 7년이란 시간을 같은 부대에서 보내야했다. 더구나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으러가야 했는데 우리 기수는 끝이 났다고 하여 포병사령부 인사참모를 찾아가 애원해야 했다. 물론 죠니워카 한병을 사들고서...

배종진 | 향토사학자·문화재청 방문교사·예비역 포병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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