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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독립운동 한 적 없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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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생각
등록일
2014-09-26 09:13:15
조회수
5031
북한 김일성이가 보천보 습격을 지휘했던 바로 그 김일성이라고 주장하는 북한과 국내 빨갱이 학자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기록 근거는, 1939년 9월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에서 발행한 {사상휘보} 20호에 실린 기사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본명 김성주 (金成柱), 당년 29세의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출신으로 어릴 때 부모를 따라 간도방면으로 이주하여 동 지방에서 자라 비단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현재 그 실모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로 시작하고 있다. 신원이 확인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나마 사상휘보의 내용은 북한 김일성의 신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게 아니다. 본명과 고향 말고는 일치하는 것이 없다.)


1937년 6월(혹은 7월) 4일 23시경 김일성 무리가 보천보를 습격하여 약탈 방화한 사건이 있은 뒤 일본의 토벌대가 김일성 일파를 뒤쫓은 결과 동년 11월 13일 김일성 무리를 급습하여 김일성을 사살했다고 하고, 김일성 사망 사실이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이 김일성의 신원은 서른 여섯 살, 1902년생으로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다.(->경성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보천보 습격 사건과 관련하여 국내 연루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1937년~1938년 사이) 소위 '혜산 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수의 보천보 습격 관련자들이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신원은 여전히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혜산 사건으로 체포된 자들은 김일성의 정확한 신상정보를 몰랐거나 발설하지 않은 것인데 알면서도 자백하지 않았을 개연성은 떨어진다. 당시 일본 경찰에선 심한 고문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동북항일연군의 근거지와 같은 핵심 정보를 모두 실토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혜산 사건 연루자들로부터 김일성의 신원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은 김일성의 정확한 신상정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라고 봐야 한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나서 발행한 사상휘보에 뜬금없이 김일성의 신분에 관한 글이 올랐는데 이것은 혜산 사건 연루자들로부터 얻어낸 정보가 아니라 이후 수집한 정보에 따른 것이니 신빙성을 주장할 수 없다.


혜산 사건으로부터 김일성의 신원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건, 사상휘보에 실린 김일성의 신분은 보천보 습격을 지휘했던 김일성이 아니라, 1937년 11월 13일 일본 토벌대에 의해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김일성을 사칭한 자의 신분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보천보 습격과 관련하여 김일성과 함께 공모한 자들도 몰랐던 김일성의 신원이 어느날 홀연이 나왔다는 것은 그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다.


결론,
보천보 습격을 지휘했던 김일성이 일본 토벌대에 의해 1937년 11월 13일에 사망하자 김일성을 사칭하는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고 그가 바로 (나서기 좋아하는) 김성주(=북한 김일성)일 개연성이 있고 사상휘보에 실린 김일성의 신원이 그렇게 해서 알려진 것일 수 있다.


이상의 추론을 뒷받침하는 증언도 많이 있다.


유성철은 소련군에서 김일성의 휘하에 있다가 해방후 1945년 9월 19일 김일성과 함께 북한에 들어와 작전국장을 맡았고, 소련군이 작성한 6.25 작전계획을 번역하였으며, 6.25 첫 발포 명령자라고 알려진 인물인데, 6.25동란 이후 권력다툼에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어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김성주(북한 김일성)는 동생(=김영주)이 체포되어 타격을 받고 있던 차에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이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름을 김일성으로 바꾸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Grigory Mekler는 1944년 소련군에 소속되어 있는 김일성을 처음 만났고, 해방후 북한에 들어와 1년여를 김일성과 같이 다니며, 정치적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법을 교육시킨 사람(spin doctor)이다. 그는 북한 김일성이 전투중 죽은 빨치산 지휘관의 이름을 도용하여 사용했다고 했으며, 해방 후 본인이 북한으로 들어와서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증언했다.


이 외에도 김일성이 보천보 습격의 지휘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관해 증언하는 사례는 상당히 많다.


(참고로, 소련은 원조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같은 공산당 조직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호의적이고 자신들의 동반자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동북항일연군의 마적단 행태를 미화하고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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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일본군에 체포되었는데 이후 전향하여 일본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등 적극적 친일행위자가 되었다. (-> 김성주의 동생 김영주가 체포되었음에도 김성주(=북한 김일성)의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김영주 체포 당시 김성주는 아직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칭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김성주(=북한 김일성)와 김영주의 정체성은 마적에 가까운데,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중국 공산당 소속이었던 바 이 집단은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구성된 게 아니라) 중국 공산당 주도의 플롤레타리아 혁명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들의 실제 행동은 보천보 습격에서 보듯이 (일본제국주의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약탈하는 마적단의 행태를 보인다.


일본군이 김영주를 체포하여 그를 전향시켰다는 건 김영주가 일개 마적이었음을 알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김영주가 독립운동을 하다 잡혔다면 그를 경찰 앞잡이로 쓴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에 하나 독립운동가가 거짓으로 전향할 경우 일본 경찰로써는 큰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일본 경찰 앞잡이가 된다는 가정은 상상하기 어렵고, 골수 공산주의자도 일본이 경찰 앞잡이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공산주의는 일본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주류로부터 배척되는 사상이다.) 일본이 김영주를 전향시켜 경찰 앞잡이로 썼다는 건 김영주가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고 골수 공산주의자도 아닌 어중이떠중이 마적이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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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이 소련군 앞잡이가 되어 소련의 사주 아래 38선 이북에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저지른 일련의 행태를 보면, 김가 일가의 마적단 습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서슴없이 전쟁을 일으켜 동족 300만을 죽게 했으며, 수령유일체제라는 전무후무한 개인숭배 체제를 조직하여 인민을 핍박하고 개혁개방을 거부함으로써 인민 300만을 굶어 죽였다. 살 길은 오직 개혁개방이지만 김정은 일당은 여전히 핵을 틀어쥐고 개방을 거부하고 대결을 고집하고 있다. 수령유일체제가 없으면 호화사치 생활이 불가능한 극소수 일부를 위해 2000만 인민의 행복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김가3대 일당에게 민족이나 인민이란 개념은 없으며 오직 자기들 무리만의 쾌락을 위해 세상을 팔아먹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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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사망하기 직전에야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소문은 거짓말이다. 김일성이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김일성이 구중궁궐에 갇혀 있던 것도 아니거니와 자기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얼마든지 주민들의 생활을 보고 다녔을 텐데 몰랐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김일성이 당시의 열악한 북한 내부 상황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김일성이 아들에게 빼앗긴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을 때 김정일은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었고 이러한 이유로 김일성이 죽었다고 본다. 정황상 김일성은 타살되었다고 본다.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김일성이 다시 북한 권력을 쥐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굶어죽어가던 주민들 사이에서 김일성은 다시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김정일은 (자신의 절대권력을 놓고 싶지 않았으므로)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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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은 독립운동 한 적 없다 1 >


북한 김일성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북한에서 선전하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치적은 그들 김일성 일파의 입에서 나온 구전 설화에 지나지 않으며 실상은 (마적단의 행위와 구별 되지 않는) 약탈 말고는 한 일이 없다.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정점으로 일컫는 보천보 습격은 애초 (일본 제국주의에 타격을 주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 물자 획득이 목적이었고 (객관적으로 드러난) 결과도 (마적단이 하는 짓과 하등 차이가 없는) 약탈 이상이 아니었다. 최대의 전과로 선전하고 있는 보천보 습격이 그랬으니 나머지는 알 만하다. (->보천보는 전략적인 관점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는 변방의 작은 마을이었다. 일본 경찰 4명 혹은 5명이 주재하였다.)


보천보를 습격한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단체는 만주를 근거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해 조직했으나 당시 일본이 지배하던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체계적인 조직이라 볼 수 없고(=수뇌부는 공산주의자였을지 몰라도 구성원이 모두 그랬을 개연성은 떨어진다.), 드러난 그들의 활동상을 보건데 (마적단이 포함된) 어중이떠중이 군소 무장조직을 끌어모아 (일제를 괴롭힐 목적으로 중국 공산당 주도로) 연대한 것일 개연성이 높다.


(->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이 조직한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공산혁명을 꿈꾸는 집단이다. 따라서 지주나 브루조아, 또 공산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민족주의 계열에 적대적이다. 동북항일연군이 저지른 보천보 습격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만한 요소가 없고 보통의 마적단이 하는 약탈과 차별성이 없는데, 약탈은 유산자(有産者)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이해하면 수긍이 간다. -> 마적단은 돈이 있는 부자를 털어야 하고 공산당 조직인 동북항일연군도 유산자를 적대시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는 공산주의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마적단이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천보 습격의 지휘자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었다는 증언과 증거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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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질문들은 보천보 습격이 독립운동이었을 리 없고 습격의 지휘자가 북한 김일성이 아니었다는 점을 증거하는 것으로, 이 질문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자기들만의 일방적인 주장 말고) 수긍할 만한 객관적 증거 자료를 내놓거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논리적으로 논박해야 한다.


질문 1 -- 북한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항일무장투쟁'이다. 여기엔 대한제국(=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보천보를 습격한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 주도로 만들어진 단체라는 점에서 애초부터 이들의 목표가 조선의 독립일 수 없거니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는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수긍이 간다. 북한에서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조선의 독립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걸 그들을 포함하여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질문 2 -- 북한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해방 후 소련 점령군의 앞잡이로 38선 이북에 진주하여 차후 북한의 수괴가 된다. 수괴가 된 북한 김일성은 개인 숭배 역사를 만들면서 보천보 습격 사건을 왜곡 뻥튀기하고 스스로를 장군, 대원수 따위로 호칭하게 한다.(-> 만주 마적단 생활을 하던 김성주는 장군(=마적단 두목)이 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상받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역사를 창작하고 호칭(=장군, 대원수)에 집착하고 호화 사치 생활에 빠진 이런 잡스런 인물이, 독립운동이라는 숭고한 작업에 참여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 (2차대전 이후 저개발국에서 선진산업국으로 올라선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의 지도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과거를 더하거나 빼려고 하지 않았다. 이처럼 큰일을 하는 사람은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따위의 허망한 짓에 관심이 없으며 오직 실질을 바라보고 진실되게 나아갈 따름이다. 자신의 과거를 조작하고 역사를 창작해 내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국력을 소모해버린 평양 김일성이와는 하늘과 땅처럼 대비된다.)


질문 3 -- 평양 김일성이 소속되었다던 단체는 '동북항일연군'이고 중국 공산당의 하부 조직인데 이 무장단체의 행적은 당시 만주에 창궐하던 마적단과 정체성 구별이 안 된다. 이들은 일본군대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피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자칭 유격대(=정규 전투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항일무장투쟁이라고 하면서 정작 일본제국주의의 힘의 원천인 일본 군대를 피해다녔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란 한자를 직역하면, '동북 지역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연합군'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연합군이라는 성격이다. 이것이 중국 공산당이 주체가 되어 조직한 것이라고는 하나 실은 동북 지방에서 독립적으로 할동하던 무장단체들을 끌어모아 연대한 성격이었음을 시사한다. 동북항일연군의 성격이 이러하다면 여기에 마적단이 끼어들 개연성도 얼마든지 있다. 마적단의 주적 역시 일본군대와 경찰이었고 또 마적단이 털어야 하는 대상은 부자이고 중국 공산당 조직인 동북항일연군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목표로 삼는 등 부자에 적대적이었다. 이렇게 공통점이 많으니 얼마든지 연합이 가능하다. 만주에서 활동하는 거개의 마적단은 스스로를 마적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활동을 (독립운동이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의적단 따위로) 과장해서 소문을 퍼뜨리는 게 의례적이었다.)


질문 4 -- 보천보 습격은 1937년이다. 평양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1913년 혹은 12년 생이다. 스물 네살 혹은 스물 다섯살의 젊은이가 부대 지휘관이었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장유의 서열을 중시하는 한국인들인데 이런 파격적인 체계가 과연 가능했을까. 체계를 갖춘 조직이라면 설사 뛰어난 능력이 있더라도 그 정도 젊은 나이라면 참모로 쓰지 지휘관 자격을 주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마적단이라면 모를까.)


질문 5 -- * 김일성이라는 인물 자체가 허구라는 설이 유력하다. (1920년대부터 전설적인 독립운동가로 소문만 무성할 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칭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평양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이고, 김일성으로 알려진 다른 인물들(김창희, 김경천, 金一聖, 김광서) 역시 본명은 따로 있었던 걸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얘기다.) (일본 토벌대가 김일성을 참수했다는 보도 기록(1937년 11월 17일과 18일)이 있은 다음에 또 김일성의 출현을 보도한 기록(1939년 5월 5일)이 있는 등 김일성이라 자칭하고 다녔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질문 6 -- 6.25동란 전 월남하여 대한민국 경찰관이 되었던 이선호 씨는 박달과의 개인적 인연을 매개로 보천보 습격에 직접 참가해서 지리를 안내했다고 하고, 이전부터 박달과 (보천보 습격 지휘자) 김일성 사이의 연락병을 하면서 실물을 여러 번 보았다고 하는데, 1946년 2월 북한 정평군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할 때에 그곳을 방문한 김성주(=평양 김일성)를 만났지만 그는 보천보 습격을 지휘한 김일성이 아니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던 정평군 인민위원회 사람들 역시 김성주를 김일성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이선호 씨는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두려워 월남했다.


질문 7 -- 김성주(=평양 김일성)가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소련군을 따라 북한에 입성하여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을 때 군중들 사이에서 그가 김일성이 아니라는 수군거림이 있었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점령군 사령관 스치차코프 대장이 급히 둘러대기를, '여기 있는 사람이 실제 김일성 장군이든 아니든 앞으로 일만 잘하면 되는것 아니냐'고 고백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전 평안남도 지사 박인각 씨와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 씨가 직접 목격한 바를 증언했다.


질문 8 -- 6.25동란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외무성 국장을 지낸 박갑동은 남한에서 남로당 조직부장을 할 때 1945년 10월 평양에서의 김일성 장군 환영식 때의 김성주 사진을 가져다, 보천보 습격 연루자로 일제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박금철에게 보여주었더니 사진 속 인물이 김일성이 아니라고 확인해주었다. 이후 박금철은 월북하여 북한의 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노동당 서열 7위까지 올라갔다고 하나, 1967년 봄 대의원 대회에서 평양 김일성 주도로 갑산파를 숙청하자, 박금철은 회의장 2층 난간에서 '보천보 전투는 별 것 아니었고(=독립운동이 아니라는 의미), 그때의 지휘관은 당신이 아니지 않소' 라는 말과 함께 투신했다고 한다.


질문 9 -- 전 함북도민회 회장 김허남 씨는 평양에서 1945년 10월 14일 10시 경에 열린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 대회에 참가하여 앳된 김성주를 보게 되면서 실망하고 그가 과연 김일성인가 의심하던 차에 나중에 9촌 숙부 되는 (후에 북한 최고재판소 소장까지 지냈다고 하는) 김동철에게 물었더니 '살고 싶으면 입 다물고 있으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질문 10 -- 보천보 습격에 참가한 이선호 씨는 자신이 일했던 김일성 부대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아편을 팔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아편과 같은 마약 장사는 범죄조직의 일상적인 현금취득원이다. (마약을 팔아 사회를 피폐하게 하는 자들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건 상식에 어긋난다.)


질문 11 -- 보천보 습격 사건은 1937년 6월(혹은 7월) 4일 23시경 100여명의 무장 인원이 보천보라는 작은 마을을 습격하여 국민학교, 우체국, 면사무소, 산림보호국 등을 방화하여 전소하고 농업시험장, 주재소(=파출소) 등을 파손하고 일본인들이 하던 상점 등을 털고 조선인이 하던 병원도 습격하여 물자와 약품을 약탈하는 등 마적단의 행적으로 보기에 무방한 사건이다.(->이러한 피해 상황은 모든 증언과 기록이 일치한다.) 무기는 (증언과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경기관총 1개, 소총 6개, 권총 2개와 탄약 몇 백발 정도를 노획한 것이 전부였다. 보천보는 일본 경찰 5명(혹은 4명)이 주재하던 평범한 마을이었으므로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리 없다. 일본 경찰은 습격 초기에 모두 달아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그 중 한 명은 2살 여자아이였다. 보천보를 습격한 무리는 동 트기 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도주했다. -> 이런 결과는 마적단의 약탈 행위와 구별이 안 된다. 이런 게 항일투쟁이라면 당시 만주에 창궐하던 마적단은 모두 항일독립군이다.


(마적단이 도적질하다가 일본군과 총싸움 한 걸 항일무장투쟁이라 부른들 (논리적으로는) 오류가 아니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항일무장투쟁이란 게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없다. 실제로 당시 한만(韓滿) 국경지역 주민들이 김일성의 공산군(共産軍) 등쌀에 피난 떠나느라 북새통을 이룬다는 사실과 김일성 무리가 이주동포 등을 납치해 갔다는 사실이 수 차례 보도되었다.-조선일보 1936년 10월 24일자,10월 29일자, 동아일보 1937년 6월 9일자)


항일무장투쟁이라고 하려면 일본 군대를 공격 대상으로 삼아야 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총구를 겨누어야 한다. 무고한 일본 민간인을 공격하는 건 항일투쟁이라기보다는 테러라고 봐야 하고, 무고한 조선인 재산을 약탈하는 건 공산혁명의 한 가지로 봐야 한다.


동북항일연군은 정규 일본군에 대적하여 맞써 싸운 일이 거의 없고 대부분 약탈을 하고 달아나는 과정에서 일본 토벌대에 쫓기다가 총싸움을 하는 식이었다. -> 보천보 습격 당일에도 이렇다 할 총격전은 없었다. 만약 일본군이 보천보에 주둔하고 있었다면 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 당시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5일 오후 1시경(=보천보 습격 다음날) 30여명으로 구성된 일본 경찰대(=토벌대)가 김일성 일파와 충돌되어 김일성파 25명 즉사하였고 경찰은 4명이 즉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보천보 습격을 전후하여 동북항일연군은 일본의 토벌대에 쫓기다가 1940년 이전에 흐지부지 사라진다.


당시 보천보를 습격한 동북항일연군을 뒤쫓은 국경 경비대(->이선호 씨가 사용한 용어)의 대부분은 조선 사람이었다고 한다. (국경 경비대의 조선인들은 객관적인 정황상 보천보 습격은 마적단의 약탈이라고 보았을 개연성이 높다. 당시 국경지대에서 그와 같은 마적단의 약탈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단체가 싸운 대상은 조선인들이었고 이들은 만주에서 창궐하던 마적 따위으로부터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게 주 임무인 사람들이었다.


질문 12 -- *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처럼 정규 일본군을 맞상대해야 그게 독립 무장 투쟁으로써 의의가 있는 것이고,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저격한 게 진짜 독립운동이요, 유관순 누나처럼 3.1운동 당시 조국의 독립을 외치어 민족을 일깨우는데 하나 뿐인 목숨 기꺼이 바친 위인이 진짜 독립투사다.)


변방의 작은 마을을 습격하여 (공공시설과 민간 재산을) 약탈 방화하여 (주민의 원성이 자자한) 사건이 어떻게 독립운동이 될 수 있나. 더군다나 약탈을 주도한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 산하 조직이다.(=조선의 독립을 위해 모인 조직이 아닐 뿐더러)-> 역사적으로 볼 때 거의 모든 공산당은 이념이 다르면 동족이라도 대량 학살할 만큼 민족공동체에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건 조선의 공산주의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산리 대첩을 이끈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보천보를 습격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은 주로 조선인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그들이 공산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 부류라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동북항일연군의 특성상 마적 생활을 하던 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리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실제 그들의 행적이 그걸 증명한다. 마적단과 정체성 구별이 안 된다.


(중국 공산당은 중원의 주도권 싸움에서 패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장개석의 국민당과 연대하는 시늉을 했다. -> 이게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공산당이 이념이 다른 상대와 협력할 때는 자기가 약세에 몰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 협력이 아니라 속임수다. 협력하는 척 하면서 몰래 힘을 기른 후 상대가 만만해지면 무자비하게 제거한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그렇게 중국 공산당에게 속아 본토에서 쫓겨나왔다. 공산당의 이러한 전형적 수법은 일제시대 조선의 공산당도 예외가 아니었고 지금의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질문 13 -- 북한에서는 보천보 습격을 하던 날 김일성이 작성한 '조국 광복회 10대 강령'과 포고문 '조선 인민에게 격함' 등의 전단을 뿌렸다고 선전하는데, 보천보 습격에 참여했던 이선호 씨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주민들을 향한 연설 같은 것도 없었고, 이선호 씨가 함께 했던 김일성이라는 인물은 말을 타고 다니지도 않았다고 한다. 활동하던 지역이 말을 탈 만한 곳도 아니거니와 부대가 말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 만약 보천보 습격 당시 북한에서 선전하는 것과 같은 전단을 뿌리고 연설을 했더라면 동아일보 기사에 전단 내용과 그것을 작성한 단체의 이름 따위가 올랐어야 한다. (보천보 습격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양일천 기자는 현장에 주재하면서 취재를 했으므로 그런 전단이 있었다면 전단 실물을 습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전혀 없다. 동아일보에서는 습격 일당을 막연하게 '김일성일파'라고만 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일파를 공비, 비적, 마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그들이 과격한 문구를 등사판으로 인쇄한 삐라를 뿌렸다고 보도했지만 내용은 소개되지 않았고 후에 알려진 바도 없다. 따라서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아마도 마적단이 약탈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짤막한 문구를 뿌렸을 것이다.)


질문 14 -- 우리나라 좌파빨갱이들은 동아일보가 당시의 보천보 습격 사건을 연일 보도했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엉뚱하게 말을 만들고 있는데 사실과 전혀 다른 얘기다.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는 보천보가 습격당한 사실을 팩트 중심으로 무미건조하게 보도하고 있을 뿐 보천보 습격의 주체를 찬양한 일이 없거니와 그들을 꼬박꼬박 공비(共匪), 비적(匪賊), 마적(馬賊)이라 칭하고 있다. 전소된 면사무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저장되어 있던 대맥(大麥) 150가마가 마적에 의해 불태워졌고, 보천보 습격 사건이 있고나서 인근 주민들 가운데 마적단의 습격이 두렵다며 피난을 떠나는 경우가 많아 '혜산진'이 북적거린다는 사실을 또한 동아일보는 보도하였다.(1937년 6월 9일자 2면) 즉슨 보천보 습격을 마적단의 약탈로 인식하고 있다. 당시 정황상 어디에서도 보천보 습격을 항일독립투쟁으로 인식하는 장면은 없다.
작성일:2014-09-26 09:13:15 115.89.71.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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