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4월 일본의 한 출판사인 자유사(自由社)라는 곳에서 김일성의 과거사를 파헤친 책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임은(林隱)이라는 분이었고, 책 이름은 ‘북조선 왕조 성립비사 -김일성 정전’이었다. 나는 이 책을 받아보고 그 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던 김일성의 소련 연해주에서의 생활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88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소련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온 저자 임은씨를 만나 두 차례 대담하면서, 김일성 과거사의 거짓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청취할 수 있었다.

임은씨는 본래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독립 투쟁가-명백히 말하면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집안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북한에 들어와 노동당 당원으로 일했고, 6.25전쟁에도 참전한 후 1952~3년 모스크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 당 대회에서 후르시쵸프 당서기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선언할 때 모스크바에 있었다고 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고 김일성을 비판했던 세력들이 숙청당하던 바로 그때 임은씨는 소련대사로 있던 이상조씨를 중심으로 모스크바에서 김일성 격하 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이로 인해 임은씨는 모스크바에 파견된 북한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대사관 2층에서 신문을 받고 다음날 평양으로 송환 당하게 되자 추운 겨울밤 대사관 2층 창문을 차고 뛰어내려 도주. 이상조 대사의 도움으로 소련 당국의 보호를 받게 되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런 그였기에 10여 년 간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여 김일성의 날조된 과거사를 파헤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협력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10년, 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이 글을 쓰는 데에만 몰두해 왔습니다. 나는 이 책을 쓰는 것이 나로 하여금 유일하게 옳은 삶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내 모든 정열과 투지를 이 책에 쏟았고 애정과 미움을 다 쏟아 이 책을 썼습니다.…나는 일체의 운명을 여러분에게 맞깁니다.…반공잡문(反共雜文)의 운명을 밟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코뮤니스트, 공산주의자이며 또한 이 때문에 비통한 각오로 이 책을 쓴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점을 통찰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반세기 후에 출판한다는 약속 하에 여러분에게 보낸 것(원고)은 사정이 생겼으니 조속히 되돌려 주셨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계통의 기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내가 여러분에 보낸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임은씨가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실체를 폭로하는 또 다른 원고를 일본 협력자에게 보냈는데 그것이 ‘어떤 계통의 기관’ 아마도 북한 공작기관이나 조총련에게 감지되어 빼앗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임은씨는 이 책의 ‘저자 자기소개’란에 ‘임은(林隱):펜네임. 출생지:나는 동양의 반봉건 식민지에서 태어났다. 직업:조선 혁명가. 경력:조선사회주의 건설에 참가,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 주소:오늘의 시대에 과연 몇 명이나 자기가 출생한 고향에서 살고 있을까요?’라고 쓰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인 임은씨가 쓴 ‘김일성 정전’이기 때문에 이 책의 신빙성을 높이 평가하였고 후일 비밀해제 되어 공개된 소련공산당, 소련외무성 등의 문서를 통해 그가 증언한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과연 소련군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함경북도 웅기, 나진으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일까? 도대체 그가 우리 민족을 항일 독립투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일까?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하던 김구 선생이나 이승만 박사,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와 맞먹을 수 있을까?

필자는 과거 김일성이 만주에서 전개했다는 빨치산 활동을 부인하지 않는다. 중국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양정우가 조직한 항일 연군의 일원으로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을 인정한다. 1943년 9월에 발간한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의 정기 간행물 사상희보 제 20호에는 다음과 같이 김일성에 대한 조사 사항이 기록돼있다.

‘함경남도 국경지대, 압록강 대안에 은거하는 소위 김일성 일파라 칭하는 비족단은 항일연군 제 1호군 제 2군 제 2사로서 김일성을 사장으로 하고 위민생(중국인)을 정치위원으로 하는 조선인, 만주인 혼합무장 비족단이다.(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는 여러설이 있으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당년 29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의 출신으로 어릴 때 실부모를 따라 간도방면으로 이주하여 이 지방에서 성인(成人)이 되어 비족단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으로 현재 어머니는 생존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장(社長)이란 200명 정도의 대규모를 말한다. 이 빨치산부대들은 일본 관동군(關東軍) 토벌대의 공격으로 재기 불능의 타격을 받아 1940년 경에는 모두 아무르 강을 건너 시베리아 연해주로 도주하게 되었다.

이런 빨치산 대원들을 받아드린 부대가 바로 소련 극동군 사령부 정찰국이었고, 이들로 부대를 편성하여 정찰활동을 전개한 것이 88특수여단이다. 88특수여단의 주둔지는 하바로브스크 근교 비야츠크라는 곳이 있다.

임은씨는 ‘소련극동군 사령부 정찰국 소속 88특수여단’의 지휘관은 중국인인 주보중(周保中)이었고 88특수여단의 총인원은 200명 정도, 중국인이 100명 내외, 조선인이 부인 포함 60명 내외 그리고 몽골.러시아 인들이 보충되었다고 쓰고 있다.

당시 88특수여단에 있던 조선인 빨치산 출신은 김일성, 최용건, 김책, 김일, 최현, 박성철 등이었고, 이들이 해방 후 북한에 들어와 공산정권 수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이 과연 소련군이 조선반도에 상륙하는 당시 즉 경흥, 웅기, 나진, 청진 등 함경북도 북단에 상륙작전을 전개하던 그 때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바로브스크 주둔지에서 출동 명령을 기다리다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조선인으로서 태평양 함대에 배속되어 웅기만 상륙작전에 참가한 사람은 단 한명 정률(鄭律)씨였다. 정률씨 외에 소련군과 함께 조선 진공작전에 참가한 고려인(소련국적의 조선인) 중에는 최종우, 최흥국, 최바르렌친, 최표덕, 정학준 등이 있었다.

사실이 이러한데 북한에서 출판된 역사책에는 소련의 대일선전포고가 선포되자 김일성은 1945년 8월 9일 ‘조선인민혁명군’에게 조국에 대한 진격명령을 하달하여 북한 전역을 해방시켰다고 쓰고 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김일성을 비롯한 88특수여단소속 빨치산 출신들이 북한 땅을 밟는 것은 8.15 해방 후 1개월이 지난 1945년 9월 19일 추석 전 날이었고, 상륙지점은 원산이었다. 역사는 날조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다. 만약 북한에서 체제 개편이 단행되고 민족화가 이룩된다면 무엇보다 먼저 날조한 김일성 역사, 김일성 신격화,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날조된 북한 역사책이 가장 먼저 소각로에 던져지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역사의 심판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강인덕 본사 고문<일본 성학원대학 종합연구소 객원교수,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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