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정아란 기자) 서울의 한 언론사 카피에디터로 일하는 미국인 브롤리 젠스터(25) 씨는 지난 주말 TV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파가 미국 토크쇼 진행자인 코난 오브라이언(53)을 보겠다며 인천국제공항에 몰려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젠스터 씨는 "코난 오브라이언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일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다"면서 "주변(외국인들)에서도 같은 반응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의 '코난 팬덤'은 이처럼 외국인들도 의아해 할 정도로 유별났다. 이 팬덤의 중심에 '유튜브 세대'가 있다는 점에 눈길이 간다.

◇ 오랜 팬덤…찜질방 체험기·졸업 축사 영상에 '폭발'

지난 12일 선착순 230명으로 제한한 오브라이언의 팬미팅 접수글에는 1만 8천 개가 넘는 댓글이 순식간에 달렸다. 접수에 실패한 팬들은 표를 사겠다며 연락처를 남기기도 했다.

이번 방한을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난 한국의 '코난 팬덤'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회사원 신현희(32) 씨도 오브라이언의 오랜 열성팬이다. 신 씨는 "스물한두 살 때부터 코난 오브라이언과 존 스튜어트('데일리쇼') 방송을 챙겨본 것 같다"면서 "정말 솔직한 모습도 좋았고, 뼈 있는 농담을 던지는 모습에 빠져 들었다"고 말했다.

신 씨처럼 미국 코미디나 토크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오브라이언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는 사람은 아는 '코난 팬덤'이 폭발한 것은 지난해 2월 그의 찜질방 체험 영상이 온라인에서 급속도로 퍼지면서부터다.

미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찜질방을 찾은 오브라이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온탕에 뛰어들고, 때밀이에 괴성을 질러대는 영상은 사람들을 자지러지게 했다.

이후 오브라이언이 인조 속눈썹을 붙인 채 눈을 깜빡이는 '움짤'(짧은 동영상) 등이 함께 돌면서 인기가 더 치솟았다.

2011년 다트머스대 졸업식 축사 영상을 통해 코난 팬덤에 입문한 이도 적지 않다.

"여러분이 중요 과제에 쏟는 만큼의 노력으로 축사를 준비해야겠다고 2개월 전 결심했고, 그래서 어젯밤 늦게 준비를 시작했다"며 좌중을 웃긴 코난은 "열심히 일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 "코난 현상은 유튜브 세대의 새로운 팬덤"

오브라이언이 2010년부터 진행 중인 TBS '코난쇼'가 여태껏 한국에서 방송된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코난 팬덤'은 기이하게도 느껴질 일이다.

할리우드 톱스타도 아닌 케이블 토크쇼 진행자를 이만큼 키운 것은 '팔 할'이 유튜브다.

 

지난 15일 강남 역삼동에서 열린 팬미팅 현장에서 만난 팬들도 하나같이 유튜브를 통해 오브라이언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코난쇼'를 비롯해 미국 방송 프로그램의 한글 자막을 제작하는 블로거들도 코난 팬덤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굳이 영어를 잘 하지 않아도, 이들 블로거가 달아주는 완성도 높은 자막 덕분에 쇼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오브라이언 방한 소식을 국내에 처음 알린 사람도 '코난쇼' 자막 제작 블로거인 'KIMMYS'였다.

한 지상파 방송사의 예능 작가는 "코난 인기는 유튜브를 자주 본 젊은 세대의 새로운 팬덤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강남스타일'의 싸이가 유튜브 덕분에 월드스타가 됐고 SBS TV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 역시 유튜브를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인기를 얻었듯이, 오브라이언도 역으로 유튜브를 타고 국내에서 스타로 발돋움한 것이다.

 

◇ 미 문화 익숙한 10~30대 여성 주축…개인사도 팬덤에 작용

오브라이언은 '꽃미남' 아이돌과는 거리가 먼, 멀대같이 큰 키에 붉은 머리의 50대 아저씨다. 그럼에도 아이돌 팬층인 10~30대 여성들이 '코난 팬덤'의 주축을 이룬다.

오브라이언에게 과자 상자와 편지를 보내 방한을 요청한 '써니 리'도 여고생이다. 인천국제공항 입국장과 팬미팅장에서도 젊은 여성들이 다수를 점했다.

유튜브를 자주 돌아다니는 이들은 '미드'를 비롯한 미국 방송 콘텐츠에 많이 노출되면서 미국 문화에 대한 거부감도 낮다. 하버드대 출신에 위트 넘치고, 어떤 낯선 경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멋진 아재'가 눈에 든 것은 당연지사다.

오브라이언의 우여곡절 많았던 개인사도 팬덤을 공고히 하는 데 작용했다.

'투나잇쇼'를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17년간 일했던 지상파 NBC를 그만둔 이후 "안개에 갇혀 나침반도 없이 방황했던"(다트머스대 졸업 축사 인용) 그가 케이블 방송을 통해 미국 토크쇼 황제가 된 이야기는 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지난 15일 팬미팅장에서 만난 여고생 유모 양은 "오브라이언이 말을 정말 재치있게 잘 해서 좋아하게 됐지만, 그 인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니 더 좋아졌다"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뉴스파인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