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인 정치 경제 체제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은 오롯이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될 때 의미가 있다. 말로는 민주주의라 하더라도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면,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문자 그대로 민주주의는 아니다.

결정을 개인적 결정과 집합적 결정으로 나누고 시장 결정과 정부 결정으로 나눌 때, 개인적 결정이나 시장 결정은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다. 그러나 집합적 결정이나 정부 결정에 대해서는 내세우기로는 민주주의라고 할지언정 엄밀하게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로 결정될 때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소수파의 뜻은 좌절되기 때문이다.

귤을 몇 개 사먹을지 시장에서 자기 돈으로 결정하는 것은 소비자의 뜻에 따라 결정되므로 민주주의에 부합한다. 그 경우 각 소비자는 자기가 사먹고 싶은 만큼 사먹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정부에서 민주주의로 결정한다면 몇 개를 먹을지는 과반수가 찬성하는 어떤 하나의 대안으로 결정되고 그 개수에 불만을 느끼는 국민은 원하지 않는데도 할 수 없이 그 개수만큼 먹어야 한다.

귤 개수를 과반수 민주주의로 결정하는 나라가 어디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시장에서 결정해야지 정부가 결정해서는 안 되며 그런 것을 정부가 결정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 관해서는, 전반부는 옳지만 후반부는 옳지 않다. 그런 것은 시장에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정부가 결정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주위를 둘러보라. 최근의 하나의 예로 국가 의료 보험으로 제공되는 치아 스케일링을 들 수 있다. 치아 스케일링을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하지 않는 것이 개인적 결정이고 시장 결정이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치아 스케일링이 집합적 결정, 정부 결정으로 바뀌었다. 치아 스케일링은 그저 하나의 예일 뿐이지만, 사회주의나 개입주의는 정부를 통해 집합적으로 귤 개수를 결정하자는 사상이다.

개인 결정과 집합적 결정, 시장 결정과 정부 결정의 타당성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은 합의 기준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대체로 이런 기준에 따라 시장과 정부의 역할이 규정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 사람마다 선호가 다르고, 견해가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면, 그런 것은 개인에게, 시장에게 맡겨야 한다. 반면 어떤 문제에 대해 선호가 비슷하고, 구성원들 대부분이 합의를 보고, 대부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주로 그런 것만 골라 집합적으로, 정부가, 처리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이고, 시장의 영역을 부정하는 것은 사회주의, 시장의 영역을 인정하되 정부가 개입하여 왜곡시키는 것은 개입주의다.

무상급식에 관한 쟁점은 사람마다 선호와 이해관계가 아주 다르다. 합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그런 것은 개인과 시장에 맡겨야지 정부가 집합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재산권을 보호하자든가, 도둑을 막자든가 하는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선호가 같으며, 국민 개개인이 하기도 힘들다. 그런 것은 정부가 집합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런 것을 정부가 집합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잠재적 도둑조차도 정부가 도둑을 막고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에 찬성할 것이다. 이렇게 시장이 할 일과 정부가 할 일은 구분되어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러한 구분에 따라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구분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체제다. 자유민주주의 외의 모든 민주주의들은 그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어 있건 엄밀하게 국민이 주인이라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아니다. 그런 사이비 민주주의들은 시장과 정부의 이런 구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런 사이비 민주주의에서는 시장이 없거나 시장 영역들에 정부가 침범하여 간섭한다.   

좌파 진보주의자들은 개인이 먹을 귤 개수를 정하는 것도 개인과 시장에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집합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으로 맞지 않고 실천적으로도 실행 불가능하다. 국민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좌파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국민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하기가 어렵다. 합리적 설득이 힘드니 그들은 무리수를 쓰게 된다. 그 무리수는 좌파 진보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선전과 선동이다.

귤 개수를 정부가 정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선전·선동에 착수한다. 일단 그들은 불만스러운 모든 것들을 시장의 잘못으로,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자본가의 이익, 가진 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한다. 그 다음, 그런 것들을 정부가 하면, 엄밀하게 자기들이 집권해서 자기들이 하게 되면, 잘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정부는 아는 것도 많고 능력도 완전하고 마음씨도 착하다고 한다. 그러니 표를 달라고, 지지해 달라고, 집권하게 해 달라고 한다. 또 국민들에게 온갖 설교를 한다. 기업가는 노동자와 함께 해야 한다고,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이윤을 공유해야 한다고 설교한다.

소비자들은 아름다운 소비, 윤리적인 소비를 해야지, 어린이의 노동을 착취해서 만든 초콜릿은 사먹으면 안 된다고 설교한다. 미국산 소고기는 광우병의 위험이 있으니 수입하면 안 된다고 설득한다. 또 사실을 왜곡한다. 천안함 폭침은 북한이 한 일이 아니고, 연평도 포격은 정부가 자초한 짓이고, 한국동란은 남한이 북한을 침입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등이다. 그들은 온갖 거짓말, 오류, 미신의 선전을 하고, 선동을 하고, 심지어 폭력도 사용한다.

소위 진보주의자들은 경제 활동을 이익 분배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들은 경제 활동을 근로자들과 자본가들이 서로 사회 배당금의 더 큰 몫을 차지하려고 벌이는 투쟁으로 본다. 이익 분배를 위한 투쟁은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합리적 설득으로는 동의를 얻을 수 없고 선전·선동을 동원해야 투쟁에서 이길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선전·선동에 호소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이론은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학이다. 그들에게는 시장은 존재해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은 정치의 대상이다. 폭력적 좌파가 아닌 경우, 그들은 과반수 민주주의를 통해 국민의 과반수의 지지를 얻고 나머지 반수로부터 이익을 빼앗으려 한다.

사회주의의 옹호자들은 자신들을 진보주의자라 부른다. 그러나 엄격하게 정해진 틀에 따라 움직이고 명령 계통에 따라 움직이는데 거기서 어떻게 개선과 혁신이 일어나서 진보하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자유주의자(liberals)라는 좋은 이름을 갖다 붙인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를 폐지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민주주의자라 부르고, 통합진보당 해산을 민주주의의 사망이라고 규탄하지만, 그들은 사회주의 독재 체제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가로 착각한다. 민중의 자유를 억제하면서 정부를 전능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혁명가도 있는가? 그들은 자기들 말만 들으면 민중들이 에덴동산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세상을 거대한 비효율적인 우체국으로 바꾸어서 어떻게 에덴동산이 도래하겠는가?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를 가난하고 부자유하게 만들 뿐이다. 이렇게 그들은 형식과 실질, 말과 행동이 다르다. 이 심각한 괴리는 어떻게 해결하나? 그들은 그 괴리를 더 없이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선전과 선동으로 메우려고 하고 있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기업가들과 자본가들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위해서 자본주의를 옹호한다. 구속받지 않는 시장 경제에서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사회적 협동의 법칙을 탐구하는 경제학에 근거하여 피력한다. 그들은 국민들이 이성과 상식에 의거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그것이 왜 옳고 왜 그른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을 말할 뿐이다. 그들은 선전·선동하지 않는다. 진실은 선전·선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실은 진실 그 자체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황수연 | 경성대 행정학과 교수, shwang@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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