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 운동가 김영환이 중국 공안당국에 당한 사연은 우리 시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것은 전체주의-권위주의 북방세력에 대한 남방세력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동북아 문제, 한반도 문제를 키신저 류(類)의 현실주의 국제정치관(觀)으로 보는 견해가 물론 불가피한 점이 있다. 힘을 가진 북방세력을 도덕적으로 단죄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만 그런 그 쪽과 세력균형을 이루며 평화를 관리할 수밖에... 하는 체념이 일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이 아닌 시민사회 차원에서는 인간으로서, 자유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운동가로서 그런 체념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주의자들은 그것을 “무모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엔 그런 ‘무모한 거역’에 의해 의지적으로 창출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거대한 역사적 변혁은 많은 경우 철옹성에에 대한 조그만 구멍내기루부터 비롯하지 않았던가?

 

북방세력의 동방(東方) 울타리 북한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지배하는 거대한 ‘봉쇄 수용소’ 다. 김영환은 그에 대해 현실주의적 체념보다는 가치론적인 거역으로 접근했다. “저런 반(反)인간적, 반(反)생명적 체제를 인간으로서 어떻게 체념할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은 마땅히 변혁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북방세력의 주축(主軸)인 중국 권위주의 공안권력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를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고, 특정한 피의사실도 알려주지 않는 채 140여 일 동안 가혹행위를 하며 “네 죄를 네가 알렸다? ” 하는 식으로, 지극히 반(反)문명적인 폭거를 자행했다. 중국은 그들의 서 쪽 울타리 티베트와 동 쪽 울타리 북한을 무슨 짓을 다해서든 ‘현상유지, status quo)' 시키겠다는 뜻을 다시 한 번 선언한 셈이다.

 

그러나 선언을 한 것은 중국만이 아니었다. 김영환 운동가 역시 휴전 이후 거의 처음으로 ‘북한 민주변혁론’을 북방세력의 종주국 땅에서 당당히 선언한 셈이다. 그는 물론 선언을 하려고 별렀던 것은 아니다. 중국 공안당국이 그를 무단히 체포 구금 고문함으로써 그의 선언이 뜻하지 않게 도출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선언은 선언이었다.

 

악(惡)의 권세는 세인의 현실주의적 체념과 침묵을 먹고 자란다. 이럴 때 운동가는 촛불 하나를 켜들며 “악의 권세야, 빛 속에 드러나라”고 외친다. 처음엔 그의 고독한 함성은 어둠 속에 파묻히기 일쑤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끝내 이길 수는 없다. 변혁은 이렇게 외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대통령 권력을 쥐려는 박근혜 문제인 안철수가 ‘악에 대한 햇볕’을 말하는 것은 정치하는 사람들의 비지니스라고 치자. 그러나 대통령을 바라지 않는 인간양심의 입장에서는 “악은 빛으로 소멸시켜야 한다”는 당위(當爲)에 살고 당위에 죽을 수 있다.

 

류근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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