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69세로 삶을 마감한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의 미이라 시신이 누워있는, 그 이름도 거룩한 금수산 기념궁전에 안장됐다. 김일성 세습 왕조의 2대 승계자로 지목되어 서열 2위의 권좌에 오른 때로부터 37년, 정식 집권한 때로부터 17년 만이다. 선군정치로 강성대국을 만들겠다던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 김일성 시대부터 장담해 온 ‘인민의 천국’ 건설은커녕 수백만이 굶어죽고 지금도 수백만이 아사지경인 ‘인민의 지옥’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김정은으로 3대째 세습되는 ‘김일성 왕조’의 죄업을 아주 미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한번쯤 읽어 볼만한 책이 있다. 영국 출신의 저널리스트 필립 쇼트(Phlip Short)가 쓴 ‘폴 포트 평전-대참사의 해부’(원제: Pol Pot-Anatomy of a nightmare)다. 분량이 877페이지라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책 부록에 개략적인 소개와 함께 실린 크메르 정권의 주요 인물만도 51명에 이르고 적시한 참고문헌의 목록도 일일이 헤일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저널리스트의 저서지만, 책 내용의 논거와 논증으로 미루어 읽는 이에 따라서는 학술 논문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책은 ‘평등주의 이상향’을 건설하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던, 폴 포트라는 인물이 뼛속까지 공산주의자가 되어 집권한 후 조국 캄보디아에서 어째서 인류 최악의 참사를 기획하고 어떻게 그것을 실천했는가에 대한 치밀한 서술이다. 책 집필을 위해 미국 중국 베트남 등 관련국들의 비밀자료를 섭렵하고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정권 핵심 인물들은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육성을 들었다고 저자는 책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앙코르와트의 나라 캄보디아에 크메르루주라는 극악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캄보디아의 근?현대사를 개괄해 볼 필요가 있다. 1863년부터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던 캄보디아는 1941년 왕위를 승계한 시아누크 체제에서 1953년에 완전 독립한다. 시아누크는 2년 후 왕위를 내놓고 인민사회주의공동체를 결성하여 1960년 국가 주석에 취임했다. 그에 앞서 1957년에 영구중립법을 선포하고 비동맹외교를 표방, 1965년부터 미국과 4년간 단교하기도 했다. 1970년 3월 국방장관 출신의 수상 론 놀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외유 중의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집권했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가 론 놀의 ‘크메르 공화국’(론 놀은 집권 후 캄보디아의 나라 이름을 그렇게 바꾸었었다)을 접수한 때는 1975년 4월 17일이었다. 론 놀 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껴왔던 캄보디아 국민들은 반란군인 크메르 루주군의 프놈펜 점거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로부터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정권이 무너지기까지 3년 8개월 동안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공산주의 혁명을 명분으로 무슨 일을 했는가. 그 혁명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크메르루주 정권이 크메르 공화국을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으로 개명한 후 제정한 국가(國歌)의 가사를 먼저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 농민의 숭고한 피/ 혁명전사의 숭고한 피/ 그 피가 가차 없는 증오와 불굴의 투쟁으로 변하여 / 우리를 예속에서 해방시킨다”--책의 저자는 이 국가 가사를 두고 “19세기 가톨릭교의 찬가에서 난 피비린내보다 더 심한 피비린내가 났다”고 썼는데 한국의 구세대가 이 가사를 읽으면 아마도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이른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연상하지 않을까.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정권은 프놈펜에 입성하자마자 환영하는 시민들의 기대와 희망을 철저히 유린하기 시작했다. 도시인들을 농촌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대대적인 소개(疏開)작업을 벌인 것이다. 영화 ‘킬링필드’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 강제 이주 장면이 책 속에서도 소상히 표현되는데 몇 문장만으로도 그 참혹상이 눈에 선하다.

“4월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무더운 달이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5일 동안 이들이 이동한 거리는 13㎞밖에 되지 않았다. 아픈 사람들은 식구들과 함께 이동을 멈추고 길가에 남았다. 어떤 이는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크메르루주 병사들에게 처형되기도 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울부짖었다. 이동 중에 사망한 이들은 그대로 버려져 파리 떼로 뒤덮였다. 출산을 앞둔 여자들은 길에서든 나무 아래서든 아무 데서나 아이를 낳았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탈북자들의 개별적 고통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 대략 150만~200만 명이 학살과 기아로 희생되었다. 근거 있는 희생자 수가 나오기 전까지 120만 여명이 살해되었다는 미확인 보도도 있었지만 1980년 통계로는 대체로 200만여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숫자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6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된 것일까.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짧은 기간에 이토록 엄청난 살육을 기획하고 지시한 폴 포트는 과연 어떤 인간인가. 본명은 살로트 소르(Saloth Sar)이다. 폴 포트는 원래 이름이 아니라 영어의 Political Potential, 프랑스어 Politique Potentielle의 줄임말이다. 책은 그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소상히 기록한다.

1925년 프랑스 보호령인 캄보디아 콤퐁톰에서 태어난 그는 평범한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냈다. ‘온순하고 남을 웃기기 좋아하는 쾌활한 학생이었다. 프놈펜 기술학교 졸업 후 파리에 유학한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를 알게 되고 귀국 즉시 공산주의 운동을 벌인다. 낮에는 학교교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은밀히 세력을 규합하는 혁명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45세 때인 1970에 민족해방군 최고사령부 부의장 겸 작전부장이 되고 밀림을 본거지로 집요한 무장 투쟁 끝에 1975년 4월에 프놈펜에 입성,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의 총리로서 대학살을 주도했다.

캄보디아는 개인적으로 내 소년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연결되는 나라다. 중학 시절의 나에게는 어른이 되면 반드시 찾아가 보리라고 꿈꾼 두 개의 역사 현장이 있었다. 이태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건지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죽었다는 중국 동정호 현장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이 바로 그곳이었다. 이태백의 죽음은 한문선생님으로부터, 앙코르와트 얘기는 지리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태백 로맨티시즘’의 최후적 상징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착월대’(捉月臺)를 찾아보는 행운을 얻게 된 때는 1989년 9월이었다. 소속 언론사의 기획 특집 취재를 위해서이었다. 소년 시절의 꿈 하나를 성취한 셈이었다. 남은 곳은 앙코르와트였다. 소년시절의 꿈과 1980년 대 중반에 영화 킬링필드를 관람하고 나서 느낀 충격과 감동의 여운이 남아 있어 2000년 연말 앙코르와트를 찾아갔다.

물론 현장에서 앙코르와트의 웅장함과 그 사원 벽에 새겨진 극정밀의 부조(浮彫)를 보면서 종교적 염원을 신비한 건축 예술로 표현한 인간의 능력에 감탄하고 사원을 타고 용트림 하듯 뻗어 있는 거목들에서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며 숙연했다. 그러나 관광객으로서의 그런 감상은 캄보디아의 현실 앞에서는 일종의 사치라는 사실도 절감했다.

앙코르와트 사원 안팎에서 하루 종일 '원 달러'(One Dollar)를 발음하며 손을 내미는 캄보디아 어린이들을 무수히 만나야 했다. (글을 쓰면서 인터넷으로 ‘앙코르와트 관광’을 검색해 보니 지금도 그런 어린이들이 여전하다고 한다). 12년 전 그때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그 ‘원 달러 어린이들’과 끊임없이 부닥치면서 새삼 절실하게 스스로 확인한 것은, 특정 이념이나 특정 체제에 대한 절대적 신념?확신의 전율할 허구성이다. 캄보디아를 킬링필드로 만든 살육의 광풍은 바로 평등이라는 이념의 구현을 위한 체제의 개혁이 그 명분이었다.

크메르루주 정권이 캄보디아 국민의 ‘정신개조’를 위해 주입시킨 평등의 개념은 실로 전율할 정도다. 평등을 위해서는 물질뿐 아니라 정신도 개인적 소유는 허용될 수 없다는 논리다. 크메르루주 정권의 첫 총리였고 폴 포트의 충복이었던 키우 삼판(한국판 책에서는 삼폰으로 표기)이 귀국 유학생들 앞에서 설파한 그 평등 개념이야말로 조선 인민공화국이 그 동안 인민을 어떤 논리로 세뇌시켜 왔는가를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서도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장황하지만 책속에 인용된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우리는 어떻게 공산혁명을 이룰 것인가.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유재산을 없애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에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있습니다. 도시를 소개한 것은 물질적인 사유재산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인 사유재산이 더 위험합니다. 정신적인 사유재산이란 여러분이 ‘내 것’ 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부모? 가족? 아내도 모두 정신적인 사유재산이지요.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런 것들에 대해 ‘나’ 혹은 ‘내 것’ 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아내’라는 말 대신 ‘우리 가족’ 이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캄보디아는 우리의 커다란 가족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남자?여자?아이들로 나뉘어 살게 된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앙카르(angkar:중앙정부 즉 크메르루주 정권 혹은 절대자의 뜻-글쓴 이)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우리 각자는 앙카르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앙카르의 아이이고, 앙카르의 남자이며, 앙카르의 여자이지요.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도 정신적 사유재산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혁명세력이 되려면 머릿속을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닌 지식은 식민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에게서 배워온 것이므로 말끔히 없애버려야 합니다. 지식인 여러분은 유럽의 영향력, 우리식으로 말하면 ‘식민주의의 잔재’를 가지고 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이 공산혁명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고, 캄보디아의 보통 사람들인 농민들과 똑같아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머릿속을 씻어내야 합니다.

물질적?정신적 사유재산을 모두 없애면 인민이 평등해질 것입니다. 사유재산을 허용하면 반드시 누군가는 조금 더 가지게 되고, 또 누군가는 조금 덜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인민이 평등해질 수 없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고 다른 사람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입니다. 사유재산을 아주 조금이라도 허용하면 여러분은 평등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책은 크메르루주 정권의 생성과 소멸을 통해 근본주의적 공산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과 정치집단이 어디까지 악행을 자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극명한 증언이다. 새삼 이 책을 다시 펼쳐 본 이유는 김정일의 사망 발표에서 장례까지 북한의 지배세력이 보여 준 행태들이야말로, 말 그대로 집단 광기의 노골적 표출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가령 김정일 사망 발표문에서 그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서술하는 문장은 이렇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는 위인이 지닐 수 있는 품격과 자질을 최상의 높이에서 완벽하게 체현하시고 심오한 사상리론과 비범한 령도로 혁명과 건설을 백전백승의 한길로 이끌어 오신 걸출한 사상리론가, 희세의 정치원로이시고 불세출의 선군령장이시며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숭고한 헌신으로 혁명투쟁의 전로정을 수놓아 오신 절세의 애국자,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우리 각자는 앙카르의 아이이고, 앙카르의 남자이며, 앙카르의 여자’라는 크메르루주 정권의 ‘철학’과 김정일을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셨다’라고 발표하는 조선 인민공화국의 ‘주체사상’은 무엇이 얼마만큼 다르단 말인가. 28살 애송이를 3대 세습의 계승자로 ‘옹립’하고 그 고모부의 어깨에는 하루아침에 대장 계급장을 달아 그 애송이 옆에 서게 하는 것이 광기가 아니라면 달리 무슨 말로 이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3년 8개월에 걸친 폴 포트의 자국 국민 살육과 한반도의 북녘에서 60여년 이상 이어 지고 있는 통치행위는 시간의 길이는 다를망정 그 본질적인 내용은 크게 다를 게 없다. 지금 우리를 처연하게 하는 것은, 그 기만적 세습통치의 종말이 언제인가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김정일의 죽음과 함께 맞은 이 겨울날에 폴 포트 평전을 다시 펼쳐보는 동안 유난히 마음이 스산해 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월간 '한국논다'2012년 2월호 전재>
조규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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