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화면에 비친 그의 얼굴은 다소 푸석 푸석해 보였다. 눈은 초점을 잃은 듯 멍했고 목소리도 분명하지 않았다. 기자가 “일각에선 김근태 전장 관 빈소를 찾지 않아 뉘우치지 않는 다는 비판도 있다”고 묻자 그는 “상(喪)중에 내가 변명하는 것보다 그냥 침묵하고 있는 게 오히려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고 답했다.

80년대 ‘얼굴 없는 고문 기술자’로 불렸던 이근안씨(72). 기자와 대화를 하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깊은 회한과 동시에 그의 삶을 짓눌러 왔던 아픔이 동시에 묻어났다. 그는 지난 70년부터 18년 동안 경기경찰청 공안분실장으로 있으면서 나름대로 국가에 봉사해 옥조근정훈장,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으나 경찰 재직 중 민청련사건으로 붙잡힌 김근태씨에 대한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로 지탄의 대상이 됐다.

정권이 바뀌면서 수배자 신세로 전락한 그가 10년 11개월의 도피생활 끝에 자수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2006년 11월 출소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자신의 삶을 참회하기위해 목사공부를 해 지금은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멍에’가 되어 그의 두 아들은 비명에 갔고 생계가 어려워 부인이 폐지를 주워 생활한다고 했다.

그의 굴곡 많은 인생행로를 들으면서 문득 이근안씨가 북한에 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악행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그로 인해 그의 삶이 그처럼 황폐화되었을까? 그가 북한에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북에서는 이근안보다 수십 배 더한 가혹행위와 고문이 일상화되고 있지만 문제를 삼는 사람이 없다. 북한에서의 고문과 가혹행위는 구조적이고 일상적이며 인륜까지 파괴하고 있다.

필자는 94년 2월 탈북자를 취재하면서 중국 심양의 한 여관방에서 만난 당시 28살의 청년을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아버지는 김일성과 같이 만주에서 항일활동을 했던 할아버지가 함남도당 간부로 있으면서 반당(反黨)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숙청되자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며 탄원을 했으나 여의치 않자 85년 함주군 보위부 건물에 불을 질렀다.

불을 지르기 전날 밤 자식들이 당할 핍박을 생각해 자식들 방에 연탄불을 피워 죽이기로 했으나 여동생 둘은 죽고 그와 형은 살아났다. 그의 아버지는 함흥시 호랑천변에서 총살형을 받았다.  86년 9월 19일 아버지가 총살형을 받기 전 그와 형은 “아버지는 나를 낳아 준 부모지만 당을 배반하고 혁명을 배반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앞으로 우리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고 오직 당을 믿고 꿋꿋이 한 길을 가겠다”는 맹세문을 아버지 코앞에서 억지로 읽어야 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청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통곡을 하면서 땅바닥을 쳤다.

지금의 북한인권상황도 그때나 마찬가지다. 정치범수용소, 교화소(교도소)는 물론 곳곳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정치범수용소에 수용중인 임신부가 조금만 잘못해도 안전지도원이 임신부 배위에 올라가서 마구 구르다가 살해하는가 하면 수용소 내 구류장에 끌려가면 남녀를 불문하고 삭발을 하고 매타작으로 초죽음을 만든 후 깨어나면 갖은 방법으로 고문을 한다.

북한에서의 고문이 얼마나 악랄한 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북한인권운동가인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박 입북사건이다. 그는 2009년 크리스마스 날 김정일에게 북한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편지를 들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갔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인권개선 촉구는 고사하고 구타, 폭력은 물론 심한 성고문과 회유를 받았다. 그런데도 그가 억류 43일만에 풀려났을 땐 자신이 당한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북한은 인권이 괜찮은 나라”라고 말해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북한에 체류하는 동안 얼마나 공포 속에 살았으면 그는 나와서도 사실을 말하지 못한 것이다. 북한에서 풀려난 후 그는 7개월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며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심한 성고문으로 결혼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북한인권운동가 수잔 솔티 여사는 한 포럼에서 “북한에선 하루에 42명의 사람들이 정치범수용소에서 무차별적으로 죽어가고 있고 37명의 사람들이 굶어죽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근안 씨의 악행이 끝까지 추격당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가 열린사회이기 때문이며, 북한에서 고문과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는데도 자체 내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북한사회가 철저히 닫힌 사회이기 때문이다. 북한인권 개선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더 많은 북한주민들이 살해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사회가 이근안 씨를 응징하기 위해 기울인 것보다 몇 배나 많은 노력을 할 때 북한주민들은 노예상태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도준호 본사대표(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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