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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빛나는 민족적인 전통을 가진 학교들에 대한 동아일보 1959.01.18 보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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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rcola
등록일
2016-09-28 09:36:32
조회수
13504
예전부터 빛나는 민족적인 전통을 가진 학교들에 대한 동아일보 1959.01.18 보도기사.







한국의 공식적.역사적.교과서적 최고(最古,最高) 학벌은 성균관대이며, 같은 Royal대인 서강대도 좋습니다. 다른 대학들은 점수가 어떻고, 세계 평가가 어떻고, 입시일이 언제고(이는 민족적으로 정통성이 있는 학교가 시중의 소위 일류.이류 언급하는 학교들보다는 좋다고 하는게, 1950년대 동아일보의 전통적 평가), 경쟁력이 어떻고, 취직율이 어떻고간에 600년 역사의 Royal대인 성균관대를 공식적.역사적.교과서적으로 결코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필자가 Royal대로 분류하는 서강대가 자기대학을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보다 좋게 생각하는지, 뒤에 나오는 대학으로 보는지 어떻게 자기평가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宮 성균관대 출신 필자 부근에 있는 御 서강대 출신들은 자신들이 분명 교황윤허 서강대라고 강력주장하여 이를 필자가 인정해 온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도 교황윤허의 서강대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 다음은 1959,01,18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어떻게 여나? 입학의 문




금년에 중학교에 입학하여야 하는 여러 소년.소녀들은 어떡하면 <좁은문>인 중학에를 진학할 수 있을까?




.....







서울시내의 웬만한 공공.사립중학교에서는 이미 신학기의 입학요령을 발표하고 있다. 즉 무시험입시 유시험입시 또는 전기.후기의 전형에로를 밝히고 있다.

....




첫째로 생각할것은 자기 성적과 이른바 입학수준에 정평이 있는 학교와 맞출일인데 이점에 있어서는 담임선생을 위시한 졸업할 국민학교 당국의 실정을 잘아는 지도가 있는것이지만 반드시 거기 맹종할 필요까지는 없다. 또는 입학여부란 반드시 졸업성적만으로 자신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성적이라도 지원자가 밀려닥치게 되면 자신했던 못하는점이 그것이다.




여기서 생각할점이 이르는 바 일류학교이니 이류학교이니 하는 정신을 피차 버릴 일이며 타파하여야 한다. 그 일류 이류학교하고 뻐기는 학교들에 관하여 따져볼 때 과연 그러한 세층에 그럴사한 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생각의 근원은 일제때 관.공립학교에 대한 일제의 찌꺼기 정신이 작용하고 있다. 그 반대로 말하면 예전부터 빛나는 민족적인 전통을 가지고 내려오고 있는 학교들이 오늘날의 일류, 이류하는 학교보다 자랑스러운 점이 더 많고, 학생의 질도 나으면 낫다.




요즘 일.이류를 말하는 학교중에는 일제때의 찌꺼기 정신과 그리고 입학생에 대한 인기전술이 다분한데다가, 해방후 십여년의 역사밖에 없어, 사회에 출세하여 활동하는 선배도 아직 없는 형편이며 입학율도 그 일류이류하는 만큼 좋지 않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한데로 몰리는 지원율을 피하도록 영리한 선택을 할것과 소위 일.이류교라는 헛된 허영심을 타파할것과 자기 졸업성적과 견주어진 입학지원으로서 '좁은문'을 더욱 좁게 들어가려고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 동아일보 출처




@ 동아일보가 출처니까, 동아일보 재단의 고려대가 이의를 신청할 수 있겠지만, 오래된 신문기사를 인용한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이 어떤지를 알아보고자 인용한것입니다. 대중언론이나 사설 입시학원들이 국가적 검증이 되지 않은 입시자료로 대중언론만의 생각으로 대학서열을 기사화하고 새로 만들기도 하려는 시도도 하지만, 대학의 학벌은 한국사나 세계사에서 가르쳐지는 Royal.Historic대학들을 능가할 수 있는 대학들이 없습니다.




한국사의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정통성이 승계되어 국가적으로, 세계사적으로 6백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 세계사의 중국 한나라 태학.국자감(국자감은 이후 경사대학당.베이징대로 계승됨), 중세 유럽에 세워진 볼로냐.파리대학.







@여하튼 대학은 성균관대나 서강대 같은 Royal대로 가는게 학술적.보편적.세계적인 학벌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다른 대학들은 비신분제 대학들입니다.





한국 체제나 학벌자격은 교과서 公교육(국사 성균관교육, 다른과목 삼강오륜 교육), 헌법, 법률, 국제법,취직, 입시점수등에 복잡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입시점수나 대중언론의 의견은 정부차원에서 발행하는 국사 교과서의 성균관교육(한국 정부는 성균관이 성균관대로 계승되었다고 정설로 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문이나 윤리시간의 삼강오륜 교육도 역대 한국민족과 한국정부의 의지나 전통수호에 해당됩니다.




세계사는 서유럽학자들의 이름과 이론이 많은걸로 보아 교황청.서유럽의 학자들이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쓴 교과서로 보여지는데, 이는 세계적 학문적 정설이라 이를 기준으로 하면 세계적으로 다 통합니다. 그래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카르텔이 입시학원이나 대중언론에서 구축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카르텔에 대항해 유교와, 국사 성균관의 기득권을 지키는 방법은, 세계의 지배세력이던 서유럽과 교황청의 세계사 교과서를 이용하는것입니다. 교황윤허 서강대와는 공조하는게 대중언론이나 입시학원의 담합에서 성대를 지키는 방법의 하나인것 같습니다. 황하문명, 유교, 한나라 태학.국자감이 세계사에 나오고, 세계사의 교황성하제도(서유럽이나 서양인은 교황중심), 볼로냐.파리대학이 세계사에 나오므로, 교황윤허 서강대와 공조하면 6백년 역사의 성균관대 기득권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협력자를 얻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농후합니다.












성대는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의 정통성을 승계하여, 6백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 참조바람
















@ 미군정기 이후의 한국정부에서 조치한 내용(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간)으로, 정부입장을 알려드립니다.










1. 정부출연 연구기관 자료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

1).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설명.

가. 한국학 중앙연구원(韓國學 中央硏究院).

한국문화 및 한국학 제분야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는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설명자료임.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 大百科辭典).

........
발간된 경위를 보면, 1979년 9월 25일 대통령령 제 9628호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였고, 동 규정에 근거하여 1980년 3월 18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편찬사업 담당부서를 두었으며, 1980년 4월 10일 제 1차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위원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12년의 기간동안 3백여명의 편집진과 3천 8백여명의 집필자가 참여하였다.











2).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이칭별칭




성균관대, 성대



•유형




단체



•시대




현대



•성격




대학교, 사립종합대학교



•설립일시




1398년



•설립자




김창숙(金昌淑)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개설




성균관대학교의 연원은 1398년(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성균관에 설치된 3년제 경학과(經學科)가 성균관대학교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시작이다. 성균관은 제향 기능을, 경학과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여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역사학·지리학·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도 부과되었다.




그 밖에 교육의 목적, 교육과정의 운영, 입·퇴학 절차, 각종 시험 및 학생의 특전, 학기제 채택 등 전통적 교육기관에서 근대학교로의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권상실 뒤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되어,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주로 문묘(文廟)의 제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게 되었다.




1930년 경학원에 로 교명을 회복하였다.




1946년 유림대회(儒林大會)가 개최되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기성회가 조직되고 독지가 이석구(李錫九)가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의 토지를 희사하였다. 이에 김창숙(金昌淑)의 주도로 종전의 명륜전문학교의 재단을 병합한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발족하면서 같은 해 9월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인가되었다.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설치하고, 초대 학장에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어 문리과대학·법정대학·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편제를 갖추었고, 같은 해 6월 각 도의 향교재단(鄕校財團)에서 재산을 기부함에 따라 재단법인을 성균관으로 확대해 개편하였다.




1958년 야간대학을 설치하였으며, 1963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이 대학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가 1979년 1월 다시 봉명재단(鳳鳴財團)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천천동에 자연과학캠퍼스을 신축하였다.




1981년 8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이과대학·공과대학·농과대학·약학대학 등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11월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3년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을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으로 분리하고, 1987년 11월 유학대학원, 1990년 2월 산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3월 의과대학, 9월 의학연구소, 10월 디자인대학원, 12월 경영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1998년 1월 건학 600주년 공식기 게양 및 현판 제막식 행사를 거행하고, 도봉선수촌 신관을 준공하였다. 같은 해 4월 북한 고려성균관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6월 교수업적 평가제를 도입하였으며. 8월 도서관 100만 장서 확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9월에는 건학 6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기념행사로 세계총장학술회의, 조선시대 성균관 재현행사, 동양학 학술회의, 연극공연, KBS 열린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를 발간하였다. 1999년 3월 자연과학캠퍼스에 의과대학 건물을 준공하고, 5월 법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출처:성균관대학교[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출판사들이 편찬하는 백과사전류에 나타난 성균관대학교에 대한 학술적 서술내용들.

1). 두산백과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成均館大學校






•사립

•특성
종합대학

•개교일
1398년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인문사회과학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자연과학캠퍼스)

•교목
은행나무

•면적(㎡)
627,025

•홈페이지
www.skku.ac.kr





성균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지만 조선 개국 후 1398년(조선 태조 7)에 현 명륜동 캠퍼스에 설립된 국립 최고학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하여,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1895년 칙령으로 3년제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경학과는 유학 경전을 위주로 교육하되 역사·지리·수학 등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과하여 근대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의 탄압으로 교육기능을 박탈당하고 경학원(經學院)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 민족의 교육열 고조로 일제는 부득이 명륜학원을 설립하였고,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6년 재단법인(현재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정규 단과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초대학장으로 김창숙(金昌淑)이 취임하였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79년 수원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96년 11월에 삼성재단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고 운영해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하 생략....







그리고 교육학사전이나, 종교학사전, 학습사전도 성균관대가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라고 학술적의견을 가지고 있고, 성균관대와 제사기구인 성균관도 그렇게 일치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서강대는 교황윤허 대학으로 그 Royal대 역사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

1960년 2월 재단법인 한국예수회에서 서강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개교하였다. 1948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Pio)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이 기획되었고, 예수회 게페르트(Theodor Geppert) 신부의 주도로 1956년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발족되면서 대학의 설립에 이르게 되었다.

초대 학장에 킬로렌(K. E. Killoren) 신부가 취임하였으며, 영어영문학과·사학과·철학과·수학과·물리학과·경제학과를 두었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생물학과·경영학과를 신설하였다. 1964년 국어국문학과·화학과를 설치하고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하였으며, 같은 해 4월 「사립학교법」에 따라 재단법인 한국예수회가 학교법인 서강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출처:서강대학교[Sogang University, 西江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대학은 Royal대인 성균관대(국사 성균관을 계승한 6백년 역사의 대학)나, 서강대(교황 윤허대학)가는게 가장 좋습니다. 두 대학의 학벌이 한국에서 가장 좋으며,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에 학벌이나 주권이 없이, 대중언론에서 강세를 띄어온 대학입니다. 현행헌법의 임시정부 조항으로 보아도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이 없는 대학이며 그 추종자들의 SKY라는 단어는 공식적인 용어도 아니고, 학술적 용어도 아닙니다.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인 성균관대 600년 역사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계기.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1. 국사에 나오는 성균관(해방후 성균관대로 이어짐). 성균관대는 600년 역사를 대통령령에 의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서술된 내용으로 행정법 측면에서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전들인, 두산백과, 종교학대사전, 교육학사전, 시사 상식사전,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및 성균관대와 성균관도 성균관대의 600년 역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균관은 단지 국내에서만 한국사로 나오는 대학으로 머무를수도 있었는데, 한국의 국력이 신장함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 재임때인 1998년에 성균관대 건학 6백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맞아 세계사적으로 그 정통성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면 법으로 자격을 보장받는게 가장 확실합니다. 여러형태의 법이나 정부의 행정법을 거치거나 또는 법률적 인정을 거치지 않고 관습법 형태로 인정받는 교과서(참고서포함)나 학술서의 학술이론(국정교과서나 정부의 심의를 필한 교과서.참고서.학술서는 법률 형태로 존재하지 않아도 관습법적 인정대상임은 분명합니다)이 가장 신뢰대상입니다. 나머지는 주로 대중언론 형태인데 법적 타당성이나 학술적 타당성이 없으며 대중들이 임의적으로 자기측 주장을 하는 루머나 항의성기사, 반체제형태의 기사나 보도들도 아주 많습니다. 언론자유로 사상의 다양성을 극도로 보장해주면 그냥 방치해 두는 보도기사도 많겠습니다. T.V., Radio, 신문.잡지등의 대중언론 보도형태가 이에 해당되는데 법적 타당성이나 관습법으로 인정받는 정부자료와 상반되는 자기들의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여하튼 성균관대 개교 600년 기념 학술회의를 계기로 성균관대는 그 600년 역사를 국내법과 더불어, 세계사적으로는 일종의 관습법 형태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할 수 있습니다. 불법.강제의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카이로 선언이후 프랑스.구소련(러시아로 이어짐).폴란드 정부의 승인을 받아 그 시점부터 임시정부는 국제법과 국내법적 타당성을 갖게됨]가 2차대전을 통하여 일본 및 이탈리아.독일등의 추축국에 선전포고하여, 추축국 정부나 해당국 관련세력들이 이에 대항해서 해방후의 성균관대나 유교를 반대할수도 있었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축국에 선전포고후, 추축국이 항복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적 전쟁아닌 다른방면의 전쟁으로 성균관대나 유교에 대항해서 교육.종교적 전쟁을 해왔을수도 있었겠습니다. 현행헌법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이 법적으로 보장받기전에는 추축국이나 관련세력들이 성균관대나 유교에 대항해서 끝나지 않은 교육.종교분야에서 총칼아닌 다른 전쟁을 해왔을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런데 UN국제법위원회가 을사조약이 무효라고하였고, 현행 한국 헌법에 임시정부의 정통성[한일병합 무효, 불평등조약 무효, 일본등 추축국에 선전포고]이 보장되고, 대통령령에 의한 행정법측면으로 성균관대(국사에 나오는 유일무이의 최고대학 성균관에서 이어져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의 600년 역사가 보장되고 있는만큼, 임시정부의 선전포고에 대항해 싸워온 나라들은 이런 법률은 준수해주어야 합니다.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이 무효라, 일본 강점기에 총독부 명령으로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기독교는 한국에 종교주권이 없음도 명심해 주셔야 합니다.




여하튼 일본이나 이탈리아나 독일은UN적국이지만,볼로냐대나 하이델베르크대 총장이 성균관대 개교 60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해 주셨으니, 세계사에 나오는 볼로냐대와 교황윤허 하이델베르크대의전통과 역사는 성균관대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세계사의 볼로냐대는 승전국들도 어쩌지 못해온세계사의 定說이라 한국의 세계사 영역도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세계사 영역(교과서.참고서등)에서 漢나라 太學(國子監), 볼로냐대.파리대를 삭제하기 전에는 그 기득권은 그대로 유지되는특성이 있습니다.




2. 성균관대가 개교 6백주년을 맞아 개최한 이 학술회의에는 12개국 19개 대학총장들이 참석했다




성균관대 건학 6백주년 기념식관련 대중언론 보도들.




1). 연합뉴스 1998.09.25 공병설(孔丙卨) 기자 보도뉴스.

(서울=연합) 孔丙卨 기자= 성균관대(총장 丁範鎭)는 25일 오후 교내 명륜당에서 金鍾泌 국무총리와 교수, 학생 등 8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건학6백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한편 성균관대는 이날 기념식에서 영국 옥스퍼드대와 이탈리아 볼로냐대 등 세계 8개 대학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했다.(끝)







2). 연합뉴스 1998.09.26 윤동영(尹東榮)기자 보도 뉴스




金대통령 세계총장학술회의 참석자 오찬







(서울=연합) 尹東榮기자 = 金大中대통령은 26일 낮 청와대에서 丁範鎭성균관대 총장과 콜린 루커스 옥스퍼드대 총장 등 서울에서 열린 세계총장학술회의에

참석한 국내외 대학 총장 및 대학 관계자 19명과 오찬을 함께 했다....

성균관대가 개교 6백주년을 맞아 개최한 이 학술회의에는 12개국 19개 대학

총장들이 참석했다.(끝)





3). 한국 대학신문 1998.09.28, 김선래 기자 보도기사.





성균관대 건학 6백주년 기념 '1998 세계총장학술회의'

......

















@ 참고자료.

1988년, 900주년의 볼로냐대학:세계 대학의 경축 사절들로부터 대학들의 ‘모교’라는

독보적이고 자랑스러운 지위를 재확인받았다.




1. 1988년 개교 900주년을 맞이하는 볼로냐대학은 세계 대학의 경축 사절들로부터 대학들의 ‘모교’라는 독보적이고 자랑스러운 지위를 재확인받았다. 오늘날 볼로냐대학은 학부 11개, 학과 33개, 그리고 8만 명이 넘는 재학생을 자랑하는 매머드 대학이다. 이런 외형적 규모 외에 ‘모교’의 전통이 ‘매머드한’정신적 유산으로 남아 있고, 이것이 볼로냐대학의 확고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50쪽)




. 출처: 유럽을 만든 대학들. 볼로냐 대학부터 유럽대학원대학까지, 명문대학으로 읽는 유럽 지성사/통합 유럽 연구회 지음/책과 함께/2015년 05월 15일 출간.




2. ...19세기에는 잠시 쇠퇴기를 거쳤으나, 1988년에는 전 세계의 학계 대표자가 볼로냐 대학이 지닌 모든 대학의 모태라는 영광스런 지위를 경축했다.






볼로냐의 법률 학교에서 유럽 최초의 대학이 성장한다.

1088년은 볼로냐 대학이 교회의 관리에서 독립된 기관으로 태어난 해로 널리 간주된다. 볼로냐 대학은 세계 최초의 대학 중 하나이며, 서유럽에서는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볼로냐 대학에서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학자는 이르네리우스로, 1084년에서 1088년 사이의 한때에 법학부를 창설했다. 이르네리우스는 이 학교에서 수업을 했으며 『로마 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의 전문가가 되었다. 이 법전은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29년에서 534년에 걸쳐 집필하게 했으며, 최근 11세기에 들어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르네리우스의 최고 업적은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에 대한 주석서 『숨마 코디키스』를 저술한 것으로, 이는 유럽 사회의 문화적 발전에 있어 중요한 단계였으며,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성문법 체제의 초석이 되었다.

볼로냐 대학은 과학과 인문학 분야에서 탁월함의 중심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로마법을 편찬하고 그 권위를 신성 로마 황제의 권위와 연계시킨 업적을 기려,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1158년 볼로냐 대학에 특권을 부여했다. 외부 압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학문과 연구의 전당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해 준 것이다. 볼로냐 대학은 당시로서는 특별할 정도로 개화된 편이었다. 11세기 후반에는 베티시아 고차디니라는 한 여성이 수업을 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교편을 잡고 수많은 대중 앞에서 강의를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19세기에는 잠시 쇠퇴기를 거쳤으나, 1988년에는 전 세계의 학계 대표자가 볼로냐 대학이 지닌 모든 대학의 모태라는 영광스런 지위를 경축했다.

"모든 대학은… 학생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유럽 대학 대헌장, 1988년



.출처: 볼로냐가 학생 도시가 되다(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2009. 8. 20., 마로니에북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학술적.연구적인 측면에서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작성일:2016-09-28 09:36:32 61.43.6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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