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건설은 1차 오일쇼크 후 국가부도직전의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구해준 단비와 같았다.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중동에 대거 진출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본지는 중동 건설 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주 사우디아라비아 한국대사관의 수석 건설관으로 5년 동안 활동했던 허재영 전 건설부장관의 ‘중동건설 이야기’를 2주에 한번씩 연재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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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란 게 모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빚어지는 일이다. 사적일 때도 그렇지만 공적일 때는 더욱 그렇다.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의 외교문제라고 예외는 아니다. 상대가 누구이며 그의 관심사가 무엇이냐에 따라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릴 수 있고 쉬운 일도 어렵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78년 봄기운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오후였다. 얼마 전에 비공식으로 한국을 다녀온 도시지방성 장관 마지드 왕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 방문 때 한국의 매에 대해서 알아보라는 국왕의 지시를 깜빡 잊고 오는 바람에 난감한 처지에 놓였으니 급히 한국에서 매를 보내도록 주선해 주면 좋겠다는 다급한 부탁이었다.

대사관에는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국왕이 우리 매를 좋아한다니, 그의 호의를 살 좋은 기회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즉시 본국에 타전을 했다. 그 당시 사우디에는 우리 기업체가 70여 개, 근로자 수가 14만 명, 연간 10억불이 넘는 외화를 벌어들이던 시절이었다. 부족한 외화를 벌기 위해 청와대는 특별 상황판을 설치하고 매일 체크할 정도로 관심이 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청와대 지시를 받은 건설부장관은 특별히 매 담당 국장까지 지명하여 속히 구해올 것을 독려했다고 한다. 국장은 전국 신문에 광고를 내는 한편 각 동물원은 물론 동물학자까지 동원해서 수소문했지만 구할 수 없었다. 매사냥이 중단된 지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쥐약으로 매가 거의 멸종된 상태였던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 간혹 기른 매는 있어도 훈련이 안 된 것들이었다. 사냥할 수 있는 것은 야생 매를 길들인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애쓴 보람이 있어 강원도 산골에서 매 한 마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3년생 암컷인데 훈련도 잘 되었다는 것이었다. 매는 어떻게 구했지만 보내는 것이 문제였다. 조수 보호 및 수렵에 관한 법률에 따라 송출이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사우디 왕의 호의를 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다. 관계 부처 국장들이 의논 끝에 김포공항을 통하여 반출하되 세관장은 이를 모르는 것으로 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본국으로부터 대사관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이 날아왔다.

“6월 10일 오전 7시 제다 공항에 도착하는 KAL기편으로 매를 보내니 즉시 사우디 국왕에게 전달하고 결과를 보고할 것”

대사관은 이 사실을 국왕 의전실에 통보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제다 공항으로 갔다. 항공사 직원이 작은 나무 상자를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꿩만한 매가 들어 있었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끝이라서인지 매는 횃대에 앉지도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이러다 매가 죽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나는 국왕이 있는 리야드로 가기 위해 탑승 수속을 서둘러야만 했다. 그런데 매 상자를 확인한 승무원은 탑승을 거절했다. 나는 마지드 왕자로부터 받은 통행증을 제시했다. 그러자 총책임자인 듯한 사람을 불러 오더니 특별기편으로 가겠느냐고 물을 정도로 태도가 표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반기로 갈 것을 요구했다. 그는 나를 정중히 비행기까지 모시고 갔다. 아니, 매를 모시고 갔다. 이번에는 비행기 승무원들이 난리가 났다. 매를 어디다 ‘모실’ 것이냐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나는 내 옆 좌석이면 된다고 말해서 소란을 수습했다.

리야드까지는 1시간 20분 거리. 그런데 그날따라 기상이 좋지 않아서 기체가 계속 요동을 치는 것이었다. 혹시 예까지 와서 죽으면 어쩌나 싶어 불안했다. 매 한 마리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 게다가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입장이라 내 노심초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내 일생에서 1시간 20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지 싶다.

리야드에 도착하자마자 상자 속부터 들여다 보았다. 매는 날갯죽지를 축 늘어뜨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었다. 본국 정부 지시에는 전달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이지 말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 상태로는 안 되겠다 싶어 생수를 먹인 후 통풍이 잘 되는 곳에 옮겨 놓고 왕궁으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 오후 5시에 오라는 것이었다. 5시간의 여유. 그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매가 기력을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금세 횃대에 올라가 앉는가 했더니, 매 특유의 매서운 눈으로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살았구나 싶었다. 매가 아니라 내가 말이다.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약속 시간에 왕궁으로 갔다. 대기하고 있던 비서실장이 반갑게 맞았다. 경호원에게 매를 들리고 국왕 집무실로 향했다. 왕궁의 기다란 회랑 양쪽에는 어깨에 가죽벨트를 두르고 아랍 특유의 환도와 창을 든 경호원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영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나오는 영화 장면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조금 슬펐다. 비록 짐승이지만 고향을 떠나 삭막한 나라에 와서 고생이나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마치 딸을 이국 만리 시집보내는 아버지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측은한 생각도 잠시, 왕의 마음에 들어서 우리 업체가 많은 공사를 따 내서 어려운 나라 살림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드디어 국왕집무실 육중한 문이 열렸다. 나는 국왕 앞에 놓인 의자에 안내되었다. 국왕은 매를 가져온 나를 보지 않고 매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리 대기시켰는지 매 감정사인 듯한 사람이 이리저리 보더니 뭐라고 아랍어로 왕에게 설명했다. 나는 국왕의 표정으로 매우 흡족해 하는 것을 알았다. 비로소 마음이 놓이면서 온 몸에서 힘이 좍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국왕은 조카인 외무장관을 통하여 나에게 말했다.
“내가 가지고 싶던 한국의 매를 선물로 받아 매우 기쁩니다. 한국 대통령께 그 뜻을 전해 주기 바랍니다.”

국왕은 수십 마리의 매를 가지고 사냥을 하지만 극동지역의 매가 없어 늘 아쉬워했다고 했다. 마침 그 자리에는 황태자를 비롯해서 20여 명의 장관들이 배석하고 있던 차라 매가 가져다 준 외교적 효과는 극대화된 기분이었다. 특히 웃음기 한 번 없이 늘 무뚝뚝하게 대하던 도로철도성장관이 그날따라 미소를 지으며 나와 굉장히 친한 척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국왕 집무실을 나올 때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얼마 후 본국에서 온 건설부장관과 함께 국왕을 알현할 기회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외국 장관이나 총리가 예방했을 때 20분 정도의 면담에 그치는 것이 관례인데, 우리와는 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더 이야기를 하자고 붙드는 것이었다. 한국의 매가 얼마나 국왕의 마음에 들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었다.

얼마 전 영국 여왕이 다녀갔는데, 오다 보니까 한국 노동자들이 굉장히 많더라고 은근히 말하기에 자기는 한국인처럼 부지런하고 일 잘 하는 사람이나 업체에는 앞으로 더 많은 공사를 맡기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77년의 우리 업체의 공사 수주액은 24억 달러 정도였는데, 78년에는 68억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자본과 장비와 기술을 앞세운 수많은 선진국 경쟁업체를 물리치고 기적 같은 많은 공사를 따 낸 것이다. 이 모두가 우리민족의 성실성과 근면성으로 얻은 결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얼마쯤은 한국의 매 한 마리가 기여한 외교적 성과였다고 말한다면 좀 지나친 과장일까?

나는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매를 보게 되면 우리를 위해 사우디 왕실로 시집간 그 3년생 암컷 매가 생각나곤 한다. 한 명의 유능한 대사보다 더 큰 역할을 했을 그 매의 모습이 떠오르면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 올 때가 있다.

허재영 전 건설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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