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신지홍 특파원) "정말 엄청난 눈폭탄입니다. 쌓인 눈이 대문을 가로막아 아침에 문을 열고 나갈 수도 없을 지경이었어요."

미국 수도 워싱턴 D.C.를 비롯한 인근 버지니아, 메릴랜드 등 수도권과 북동부 일대 곳곳이 23일(현지시간) 완전 고립됐다. 거의 역대급의 기록적인 눈폭풍이 하룻밤 만에 전역을 백색 눈더미로 덮어버린 탓이다.

눈을 뜰 수 없는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와 성인 무릎 정도까지 차오른 적설로 백색 외에는 천지분간을 할 수 없는 '화이트아웃'(whiteout)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후 들어 눈보라는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거세게 불어쳐 제설작업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날 오후 가시거리는 150m 정도. 그야말로 '설국'(雪國)의 경지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낭만적'이 아니다. 각 주와 기상당국은 초강력 눈폭풍의 상황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라며 시시각각 강력한 경고를 내놓고 있다.

방송은 곳곳의 고립 사태와 사망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어 동부 일대는 삽시간에 '스노마겟돈'(Snowmageddon·눈과 최후 종말을 뜻하는 '아마겟돈'을 합친 말)의 공포와 긴장에 휩싸였다.

이날 오전 워싱턴 D.C. 인근 베드타운 센터빌. 1985년에 도미한 교포 사업가인 김상군씨는 "눈을 치우려고 문을 여는 데 쌓인 눈에 가로막혀 문이 열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며 "1990년대 초 이래 이런 눈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그는 "오늘 밤까지 계속 눈이 온다고 해 제설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오늘 오전에만 3차례의 정전이 있었다"며 "이 정도라면 다음 주 초까지 꼼짝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번 눈폭풍으로 인한 일대의 고립 상황은 꽤 지속할 것 같다. 눈폭탄이 이어지면서 제설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어서다.

한국인 주재관들이 모여 사는 워싱턴 D.C. 인근 베드타운인 맥클린 일대 역시 거의 고립 상황이다.

이날 오전 제설 차량이 서너 대가 대로를 위주로 돌며 눈더미를 길 양옆으로 밀어내고 있지만, 도로는 곧바로 눈에 뒤덮이고 만다. 대로는 그나마 낫다. 주택가 진입로는 이들 제설 차량이 들어올 엄두도 못 낸다.

스키장을 방불케 할 정도의 적설로 인해 주택가들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했다.

주민들이 삼삼오오 나와 집앞의 눈을 치우는 게 보인다. 하지만 눈더미가 엄청나고 치우면 곧바로 다시 눈이 덮는 양상이어서 눈삽으로는 불과 5m 앞으로도 전진하지 못한다.

맥클린 주택가 헤이즐레인에 사는 알렉스씨는 "어제 식료품과 땔감을 잔뜩 사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며 "적어도 일요일까지는 꼼짝도 못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분사식 제설기인 '스노 블로어'까지 동원해 집앞의 눈을 치웠지만, 2시간 정도가 지나자 흔적도 없어졌다.

버지니아 주에 거주하는 30대 초반의 이튼 필드 씨는 "10년에 한 번꼴로 이런 큰 눈이 오는데 이번 눈 역시 굉장하다"며 "차 옆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이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이민생활 35년째인 서재홍 수도권메릴랜드한인회 회장은 "미국에는 눈이 와도 왕창 온다. 과거에도 큰 눈이 온 적 있지만 이번 눈도 상당한 규모다. 대부분 사람들이 아예 꼼짝도 못하고 있다. 지금 상황대로라면 주말은 물론이고 월요일까지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대부분 물건을 미리 사놨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다"며 "이러다 정전까지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동부 한인들은 며칠 전부터 대대적인 폭설 예고가 이어지자 H마트 등 한인상점에서 쌀과 라면, 연료 등을 거의 '사재기' 수준으로 사다 비축해놓았다고 한다. 강도호 워싱턴 총영사는 "현지 언론이 식량준비, 외출자제 등을 계속 경고해온 터라 한인들이 미리 준비를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눈폭풍이 강타한 미 동부 곳곳에서는 이날 하루종일 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고 전해졌다.

버지니아 주 서쪽의 켄터키 주를 남북으로 가르는 75번 주간(州間) 고속도로의 남행선. 엄청난 눈폭풍에 22일 밤부터 35마일 이상 차량이 정체되면서 거대한 주차장이 형성됐다. 주 경찰과 방위군, 비상인력 등이 총동원돼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행렬에 물과 연료, 과자 등을 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이미 최대 19시간 이상 이 정체는 계속되고 있다. 이 도로 트럭휴게소에 차량을 주차한 채 갇혀 있는 마이크 에드먼즈는 AP와 전화통화에서 "도저히 나갈 수 없다. 시동을 걸어도 바퀴는 공회전을 할 뿐"이라고 전했다.

대니 가너 역시 CNN과 통화에서 "2살, 3살, 14살 아이들과 시어머니와 함께 미니밴 차량에 갖혀 있다"며 "음식도 없고 물도 없다. 다만 석유는 충분해 히터를 틀고 밤새 버텼다"고 말했다.

켄터키 주 경찰은 "트럭에 트럭이 꼬리를 물고 있다. 많은 차량이 도로 밖으로 미끄러져 있다"며 "차량들에 접근해 사람들을 도로 밖으로 구출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이번 역대급 눈폭풍으로 인한 피해자는 전국적으로 8천500만명에 달한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주 등 11개 주는 비상사태를, 워싱턴 D.C.는 '폭설 비상'을 각각 선포했다. 총 9천290대의 항공편이 중단됐다. 워싱턴 D.C. 인근 덜레스 공항을 취항하는 대한항공도 이날에 이어 24일 결항이 확정됐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비롯한 13개 주에서 전력 중단 사태가 발생해 15만9천명이 애를 먹었다. 버지니아 주에서만 1천여 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교통사고 등으로 9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필라델피아 시는 '코드 블루'를 발령했다. 이는 '홈리스'를 목격하면 반드시 경찰에 신고하거나 가까운 피난처로 대피시켜야 하는 명령이다.

뮤리엘 바우저 워싱턴 D.C. 시장은 "주민이나 방문객이나 모두 안전한 장소에서 나오지 말라"며 "생사가 걸린 상황이다. 집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 도로로 나오지 말라"고 강조했다.

미 기상청은 이날 늦은 밤까지 눈폭풍이 이어져 워싱턴 D.C.의 경우 최대 60㎝의 적설량을 기록할 것으로 예보했다. 눈폭풍은 워싱턴 D.C. 역사상 가장 강하고 적설량 면에서도 역대 5위 안에 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역대 워싱턴 D.C.의 최고 적설량은 1922년 71㎝였다.

또 눈폭풍을 동반한 강풍은 최대 시속 80㎞로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뉴욕도 예상을 뛰어넘어 최대 76㎝의 적설이 예고되고 있다. 이 때문에 뉴욕과 롱아일랜드는 오후 2시30분을 기해 교통이 전면 중단됐다. 메릴랜드와 웨스트버지니아는 최대 150㎝의 폭설이 예상된다.

기상청 웹사이트는 "생명을 위협하는 눈보라"가 예상된다면서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직경 5㎝ 크기의 눈폭탄이, 중동부 대서양 연안에서는 홍수가 각각 닥칠 것으로 예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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