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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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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생각
등록일
2014-10-10 09:34:11
조회수
4159
< 예술은 기술이다 >


예술을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예술은 기술이라는 본질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18세기 이후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근대과학의 부흥으로 전통적인 미신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시기) 유럽 철학계에서도 전통적인 관념을 깨기 위한 온갖 몸부림이 일어나는 와중에, 예술계도 예외 없이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해 (무작정) 반발하는 흐름이 생겨났고 예술을 자기 멋대로 정의하고 행위하는 (자칭) 예술가들이 우후죽순 일어나면서 예술가가 마치 새로운 사상과 관념을 창조할 권리를 가진 부류인양 행세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뜬금없는 흐름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이 기술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데엔 합리적인 이유가 없고 (자칭) 예술가들의 (뜬금없는) 아집에 불과하다.)


예술은 기술이라는 사실을 거부한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기본 개념이 잘못되어 있다는 의미이며 기술의 가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술의 가치는 예술의 가치와 완전히 같다. 가령 이런 것이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물건을 보면 습관적으로 [예술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우리의 무의식에서는 기술과 예술을 동질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시대 조각된 십이지신상, 진시황 능에서 발굴된 병사 조각상 등을 보면 숨이 턱 막히게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 조각상이 아름다운 건 그것을 만든 장인의 기술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기술적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러한 조각상을 만들 수 없다. 그들 조각상이 아름답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고 그렇게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예술가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지 못하는 건 그만한 기술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유물인 청동거울 다뉴세문경은 현대 기술로도 같은 복제품을 만들 수 없을 만큼 기술적 능력이 뛰어난 예술품이다. 다뉴세문경으로부터 감탄하게 되는 건 뛰어난 제작 기술 때문이다.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오직 기술적 탁월함에서 아름다움이 나온다. 마치 최고의 성능을 나타내는 자동차가 예술적으로 느껴지는 것과 같다.(->자연계에서 최고의 성능을 보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질적으로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한계를 극복하고 최상의 성능을 보이는 기계는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법이고, 최적의 성능을 보이는 디자인이 최상의 아름다움이다.)


경기도 이천의 도자기 체험을 하는 곳에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도자기는 예술 작품이 될 수 없다. 왜 예술이 될 수 없냐면 기술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도자기 장인과 일반인의 차이는 기술력의 차이다. 도자기 장인이 느끼는 아름다움과 일반인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지만 단지 기술력의 차이 때문에 일반인은 장인이 만드는 것과 같은 수준의 (아름답고 실용적인) 도자기를 만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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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재는 척도로 眞 善 美가 있다. 미스코리아를 선발할 때 등수를 매기는 단위가 되기도 한다. 진(眞)은 진리라는 의미이다. 진리는 말 그대로 우주의 근본 이치이므로 삼라만상의 본질이다. 선(善)은 착하고 선하다는 말인데 바르지 않고서는 착할 수가 없는 법이고 바르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맞다는 말이고 자연의 순리에 맞다면 반드시 유익함이 있는 것이어서 만일 유익함이 없다면 무엇을 착하다고 하고 선하다고 할 것인가. (즉슨 착하고 선하다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최종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유익한 결과를 바래어서 착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맞게 행하다 보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유익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유익한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이 무언지를 계산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본능적으로 자연의 순리에 맞게 행하면 그것이 바로 착하고 선한 것이니 이것이 결국 유익함이 된다.) 여기서 바르다는 것은 眞에 비춰보아 그렇다는 말이다. 미(美)는 아름답다는 말인데 예술에서 추구하는 바가 이것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보기 좋고 듣기 좋고 느낌이 좋아서 만족스럽고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구체적 대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기분이 나빠지는 아름다움이란 있을 수 없다.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추하다고 한다.(->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아름답다고 정의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잘못된 말이니 악마의 논리다.)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우주의 이치에 어울려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우주의 일부이므로 우주의 이치에서 벗어나서는 좋은 상태가 될 리 없고 기분이 좋아질 리도 없기 때문이다. 즉슨 내가 보거나 듣거나 함께했을 때 아름답기 위해서는 그것이 眞에 비춰보아 어울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


眞은 진리 자체를 의미하므로 신과 동격이고 우주를 운행하게 하는 근본 원리다. 그런데 진리는 만고불변이므로 현상에 나타날 수 없다.(=현상에 나타나는 건 전체가 아니라 부분(=본질이 아님)이고 나타난 모든 것은 변화하고 멸하므로 불변인 진리는 현상에 나타날 수 없다.) 善은 眞을 추상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즉 眞이기 위해서는 착하고 선해야 한다는 말이다. 美는 眞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즉 아름다운 것은 眞이고 추한 것은 眞이 아니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추한 것인지는 그것이 眞(=善)인지 아닌지를 구별해 보면 된다.


-> 眞은 현상에 나타날 수 없을뿐더러 생각으로도 잡아 놓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개념이고, 善은 眞이 추상화된 관념이고, 美는 善(=眞)이 구체화된 모습으로 드러난 형상이다. (=眞은 진리이고 善은 진리에 대한 이상적 관념이고 美는 이상적 관념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善은 착하고 선하다는 말인데 착하고 선한 것은 항상 좋은 것이다. 이것은 불변이다. 진리처럼 불변이다. 문제는 어떤 것을 두고 착하고 선하다고 하느냐이다. 가령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착하고 선한 것인데, 물질로 보상하는 것을 부모 공경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게 아니라 체면치레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식들로부터 물질적 보상을 받아야만 부모 대접을 받았다고 판단하는 부모 역시 욕심에 빠져 공경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일 수 있다. 원리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건 착한 일이지만 어떤 것이 과연 진정 부모를 공경하는 것인지는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없다. 빚을 내어 부모에게 물질적 보상을 하는 건 부모가 바라지 않는 것일 수 있다. -> 진심에서 우러나온 정성이라면 형편에 맞게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부모 공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착한 것은 항상 좋은 것인데 무엇이 착한 것이냐는 딱히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善은 추상적인 관념이다.


美는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구체적 대상이 있어야만 느낄 수 있다. 구체적 대상이란 그 대상이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한 그 아름다움은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즉 아름다움엔 구체적 형상이 있다. 善에는 구체적 형상이 없지만 美에는 구체적 형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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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서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이고 그 아름다움을 구체적 작품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형상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즉 眞 善 美 에서 美를 추구한다.


眞은 형상이 없을 뿐더러 그것을 추상화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善 역시 추상화된 개념일 뿐 구체적 대상이 아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악당을 응징하는 폭력은 선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악당이 선량한 사람을 괴롭히는 폭력은 악한 것이다. 이렇듯 폭력이라는 구체적 행위는 그 자체로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데 그 동기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건 추상적인 게 아니다. 아름다움은 이미 구체적 대상이 있고 나서 그것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건 구체적 대상을 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결정된 것이다.


예술행위를 한다고 할 때, 아름다운 것을 만들려고 노력하면 그건 예술이다. 그런데 아름답지 않은 것을 만들려고 하면 그건 예술이 될 수 없다.


아름다움이란 구체적 대상이 이미 있은 다음에 성립하는 것이고, 아름답다는 것은 眞에 비춰보아 어울리는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다. 아름다움을 이해하는데 따로 해석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아름다움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아름다움이란 없다는 의미이고 인간이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고 아름다움이란 창작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기존에 있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뿐이지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작할 수 없다.


예술도 그러하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기존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가가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작하는 게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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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기술적인 능력이다. 예술가에게 예술적 감각이란 게 따로 필요한 게 아니다. 아름다움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고 그러한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아름다움인데(=예술적 감각은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따로 무슨 예술적 감각이 필요하냔 말이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한 탁월한 기술적 능력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반드시 장인이고 기술자이어야 한다.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와 예술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의 기술은 기본적으로 차별이 없는 것이다.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도 한편으론 예술을 한다고 할 수 있고 예술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도 한편으로 기술자에 다름 아니다. 그 둘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예술가의 재능이란 달리기 잘하는 재능처럼 천부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다. 빨리 달리는 재능이 없어도 열심히 훈련하면 보통 사람보다 잘 달릴 수 있듯이 예술적 재능도 얼마나 잘 훈련하느냐에 따라 그 실력에 차이가 나는 법이다. 훈련을 잘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예술적 재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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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眞을 탐구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한다. 善은 가장 바람직한 것, 최적의 것을 의미하는 말인데 철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이 여기에 해당한다. 美는 구체적으로 드러난 형상으로부터 느끼는 아름다움이다. 美를 추구하는 것은 예술이다.


美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느낌이다. 구체적 대상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느낀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따라서 예술 행위는 철학이 아니고 사상이나 관념도 아니다. 단순하게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예술가는 철학자가 아닐뿐더러 과학자도 아니고 사상가도 아니다. 예술가는 장인이어야 한다. 예술가가 장인이어야 한다는 말이 예술가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예술가와 기술자를 동등하게 취급한다고 해서 예술가를 폄하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가가 생산하는 작품은 기술자의 것과 달리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아름다움을 생산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예술가가 함부로 사상가, 철학자 흉내를 내는 것은 본분에 어울리지 않거니와 꼴불견이고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잘못된 관습이니 이것을 버려야 한다.


예술을 빌미로 사회비판에 몰입하거나 선전선동을 하고 남을 비난하는데 열중하는 건 (명백하게) 예술이 아니다.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선동가 내지는 사회비판가일 따름이지 예술가가 아니다. 그런 행위의 결과가 아름다울 리도 없거니와 진짜 예술을 흐리고 좀먹는 것으로써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을 멀리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사회를 혼란케 하는 주된 요인이다.
작성일:2014-10-10 09:34:11 115.89.71.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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