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이란 남북대화에서 양측이 악수를 나누면서 함께 외칠 수 있는 구호입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지만, 일단 그렇습니다. 한국사회에서도 통일의 방법과 내용에 대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용어는 ‘평화통일’뿐이며, 그 이상의 논의는 어렵습니다. 한발만 더 들어가 어떤 평화통일이어야 하는가를 논하기 시작하면 합의통일인가, 흡수통일인가, 중립통일인가 라는 식의 얘기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곧바로 보혁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헌법 제4조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에 근거한 평화통일’만을 규정하고 있지만, 국민들 사이에는 통일의 방법과 내용에 관한 논의는 부재한 상황입니다.더욱 답답한 것은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서도 국민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는 우리가 바라는 내용의 통일이 가능해지더라도 돈이 많이 든다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201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세의 필요성을 언급했을 때, 곧바로 반대론이 제기된 것도 통일비용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용을 이유로 통일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다섯 마디가 있습니다. 첫째, 통일비용이란 고무줄처럼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는 것이므로 너무 과장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통일비용의 원래 뜻은 북한주민의 생활수준이 남한과 같아지기까지 들어가는 돈이지만, 형편이 안 되면 목표를 70%로 낮출 수도 있고, 50%로 낮출 수도 있습니다. 북한주민이 고향을 떠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수준으로 더욱 낮출 수도 있습니다.

둘째, 강한 통일열정이 있다면 비용은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사랑하는 남녀는 아파트를 살 돈이 부족해도 전세방이나 월세방에서도 신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통일비용보다 훨씬 더 큰 분단비용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막대한 국방비는 물론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도발로 숨져간 우리 장병들의 목숨은 대표적인 분단비용입니다.

넷째, 통일비용보다는 통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통일편익이 훨씬 더 큽니다. 국토가 넓어지고 시장규모가 커지는 것이나 남한의 자본력과 기술력이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과 결합하여 더 높은 경쟁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수치로 나타나는 편익들입니다. 이산가족이 혈육을 만나거나 실향민이 고향땅을 찾아 흘리는 감격의 눈물은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편익입니다. 이러한 통일편익들은 후손만대로 계승됩니다.

다섯째, 통일이 가지는 세계사적 민족사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통일을 ‘비용 대 편익’이라는 셈법을 통해 결정하겠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입니다. 한국이 21세기 아시아-태평양 시대의 세력의 중심국가가 될 것이라는 폴 케네디의 예언을 그대로 믿지 않더라도, 한국이 통일을 통해 세계사 속에서 더욱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이는 비용차원을 넘는 문제입니다. 민족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한반도는 수천년 동안 하나였고, 고려와 이조 992년간도 하나였으며,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하나였습니다. 60년이 넘어가는 현재의 분단 상태는 일시적인 부자연스러움일 뿐입니다. 이 부자연스러움을 벗고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겠다는데 돈 계산이 웬말입니까? 

이에 더하여, 기회의 희소성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통일이란 국내외 모든 여건들이 들어맞아야 가능합니다. 여건들이 합치되었음에도 비용을 이유로 기회를 흘려보낸다면, 다음 기회는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500년 후일 수도 있고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독일은 다가온 통일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통일의 세계사적-민족사적 의미를 폄하하고 금전적 잣대를 내세우는 젊은이들에 대해 기성세대는 무한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통일편익이 통일비용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통일편익은 후세들이 누리는 것인데, 내가 왜 그들을 위해 세금을 내야 하느냐”라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그것이 자기들을 위해 희생한 부모세대를 욕보이는 말이라는 사실을 일러주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통일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어떤 주변국이 통일을 지지해주겠느냐고 가르쳐야 합니다.

김태우 통일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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