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태국 출장길에 나서면서 병상에 계신 명예회장님 걱정으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비행기를 탔는데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인수한 동남아 최대이자 태국 유일의 스테인리스 냉연회사를 성공적으로 출범시키고 돌아와 명예회장님께 자랑스럽게 말씀드리고 칭찬도 듣고 싶었는데 이렇게 먼 외국에서 임종(臨終)도 지키지 못하는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1975년 철강회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제가 막연히 포항제철소의 야경(夜景)에 반해서 입사를 결심했을 때 명예회장님은 말단 직원들에게도 늘 회사의 사명을 말씀하셨지요. '제철보국(製鐵報國)'. 좋은 철강제품을 만들어 조국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얼핏 진부하게도 들렸던 이 말씀들은 한번 두번 들을 때마다 명예회장님의 그 형형한 눈빛과 표정과 어우러져 어린 철강인의 가슴 한가운데 커다랗게 자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제철소 현장을 구석구석 찾으시며 호령하던 목소리와 힘찬 발걸음 소리. 무서우면서도 반가웠던 그 소리를 이제 어디서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임원 승진이 늦어져 의기소침해 있을 때 유럽사무소를 찾아주신 명예회장님은 "애로가 없느냐"며 다독거려 주셨지요. 어려서부터 객지생활에 익숙해진 저로서는 아버지를 뵌 듯 반가웠습니다. 지난 3월에도 예의 그 활기찬 모습으로 제 어깨를 두드리며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셨지요. 이 땅에 일관제철소를 처음 연 대전문가께서 20년도 더 나이 차이가 나는 어설픈 후배에게 그 힘찬 목소리를 들려주시니 아직은 한참 동안 우리 곁을 지켜주시겠구나 하며 안도했었는데….

지난 9월 포항제철소를 다시 찾아주셨을 때도 "포스코가 이룩한 공적에 대한 상찬은 제철보국의 목표를 향해 불철주야로 피땀 흘린 포스코인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며 험난한 형극의 길을 함께 헤치고 나왔던 임직원들에게 그 공을 돌려 저희 후배들을 울컥하게 만드셨지요. 그때도 명예회장님이 저희 곁에 오래오래 계셔서 등불이 되고 길잡이가 될 것이라 굳게 믿었었는데….

명예회장님! 경북 포항의 포스텍 교정에 있는 노벨상 수상자의 빈 좌대(座臺)가 보이시지요? 이제 얼마 기다리지 않아 명예회장님이 꿈꾸시던 열망이 이뤄질 듯도 한데 이제 누구와 더불어 저 좌대에 노벨상 수상자의 동상을 올려야 합니까? 아직도 저희 곁에서 이끌어주고 책망해주실 일이 너무도 많은데 이렇게 급히 가신 건 청춘을 회사와 국가를 위해 소진한 때문인가요? 회사에 큰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모시고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 거라 믿어서 미처 명예회장님이 안 계신 상황에 대한 준비도 못 했는데 아직도 회사가 넘어야 할 많은 고비를 이제 누구와 함께 넘어야 합니까?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붕천(崩天·하늘이 무너짐)'이라고 한다지요? 포항에서, 광양에서 포스코 임직원들은 지금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비통한 심경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록 명예회장님께서 몸은 저희 곁을 떠나지만 마음은 영원히 저희 가슴에 살아계실 것이라는 데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천지(天地)를 가르는 어떠한 큰 힘도 우리 마음속에서 명예회장님을 뺏어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명예회장님께서 그토록 염원하셨던 세계 최고의 기술력 확보도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해외 원료광산 투자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어 조만간 큰 성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비록 많은 것이 서툴고 모자라지만 명예회장님이 꿈꿔 왔던 모든 일을 남은 저희의 힘으로 하나하나 이뤄내 보려 합니다. 명예회장님이 남겨주신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묵묵히 실천해 갈 것이니 지켜봐 주십시오.

명예회장님!

저희 후배들에게는 너무도 큰 자랑이었지만 자신보다 회사, 가정보다 국가를 항상 먼저 생각하셨던 당신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지몽매한 후배들이지만 명예회장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위업에 흠집을 내지 않도록 열심히 정진할 것이오니 이제 무거운 짐일랑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가끔은 바람이 되고 비가 되어 포항제철소 잔디 위에도 내려오시고 광양제철소 백운대며, 포스텍의 도서관에도 찾아오십시오. 저희는 그곳에서 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
<12월 14일자 조선일보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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