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회령시가 고향인 저는(이상국 가명, 25살) 너무도 어린 나이에 수차의 북송, 교화소(교도소) 생활, 탈출 등 북한당국의 가혹한 처벌과 절망, 죽음의 고비를 겪으며 10여년 만에 끝내 한국으로 입국했습니다.
 
북송된 이들이 얼마나 가혹한 처벌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이 생생합니다. 주모자는 사형이고 동조자는 정치범수용소에서 최장 5년까지의 교화형... 북한당국은 한때 초범을 봐주기도 했으나 2004년 이후 탈북한 주민들에게는 ‘나라를 배반’해 의도적으로 갔다며 처벌이 더 강화됐습니다.
 
 ‘고난의 시기’인 1995년, 한해 차를 두고 부모님들이 잇달아 굶어 돌아가셨고 형제(누이와 남동생, 당시 저는 9살이었다)들은 먹을 것을 찾아 뿔뿔이 헤어져 아직도 소식을 모릅니다. 졸지에 ‘꽃제비’가 되어버린 저는 북한 전역을 다니며 빌어먹고 주어먹고, 추위에 떨었지만 이런 세상살이를 숙명처럼 여겼습니다.
 
1997년 2월 중순 양강도 대홍단군을 떠돌며 언 감자를 주어먹던 우리(함께 지내던 꽃제비들)일행 3명은 국경경비대의 감시를 피해 건너편 중국 농촌 마을로 넘어갔습니다. 중국 밭들에는 채 가을하지 않은 옥수수와 얼어붙은 무, 배추들이 그대로 있었는데 이것이 굶주린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게 한 동기였습니다. 밭주인들이 쫒고 공안의 항시적인 위험이 뒤따랐지만 아무튼 북한에서 보다 배를 곯지 않아 우리에겐 호사(好事)였습니다.
 
2002년 1월 중순 중국 연길시 교외에서 공안에 모두 잡혀 함경북도 온성군 보위부로 북송되었습니다. 온성군 ‘노동단련대’에서 청진시 보안서, 회령시 보안서에서 노동단련대로 1년 가까이 고역에 시달리다 결국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잘리고서야 풀려나왔습니다.
 
구류장과 강제노동에 너무도 혼이 나 다시는 중국에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집도 먹을 것도 없는 저로서는 회령시 ‘노동단련대’에서 알게 된, 철만(가명, 당시 18살)과 그 해 11월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탈북 하여 2년을 연길에서 살았습니다.
 
2004년 8월 말 중국 연길시에서 우연히 한국행을 준비 중인 탈북자(여자 6명, 남자 3명)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북경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가는데 합의를 보았습니다.
 
연길에서 버스로 14시간을 달려서야 북경에 도착한 일행은 아침 7시 20분, 곧바로 한국대사관 후문 앞으로 진입했습니다. 보초근무를 서는 경비병을 제압하고 일행 모두 대사관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습니다.
 
대사관 울타리 안에 들어서서 한국대사관 직원의 면담을 요구하자 중국 외교관이라는 사람이 ‘빨리 여기서 나가라, 너희들 이곳으로 들어오겠으면 8시 대사관 정문을 열면 오라, 그때 받아주겠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일행은 준비한 칼을 모두 목에 대고 ‘접근하면 목을 베겠다’고 하며 뒤로 물러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정문 밖에 매복한 경찰들이 불의에 달려드는 바람에 모두 잡히고 저와 한명이 도로를 가로 질주해 다행이도 목숨을 건졌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은 북송되어 정치범수용소에 갔을 것입니다.
 
이듬해 3월 심양에서 체류하던 중 또다시 공안에 잡혀 신의주보위부로 북송되었습니다. 그 후 회령시 보안서에서 예심을 받고 회령시 인민 재판소에서 북한형법 233조(후단, 비법월경), 유기형(3년)을 받고 회령시 전거리(12교화소)에서 만기를 채웠습니다.
 
전거리 교화소가 어떤 곳인지는 더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면회 올 가족이 한명도 없는 저는 3년간 생활에 해골만 남았습니다. 몸이 점점 쇄진해 눈뜰 힘도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낮에 주운 쇳조각으로 왼손 팔목의 핏줄을 아홉 군데 끊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옆에 누운 사람이 뿜어져 나오는 피를 발견하고 소리를 치고 신발 끈으로 동여 지혈해 죽지 못했다. 이 일로 저는 ‘낙오자’라는 명찰을 달고 6개월간 ‘똥통’을 메고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2008년 10월 말 만기 출소 당시 혼자서는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한 달을 지나고 다시 온성군 남양구에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2009년 12월에 중국 심양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후문으로 진입하다가 영사관 경비병들에게 잡혀 2010년 1월 신의주 보위부로 북송되었습니다. 3월 초, 회령시 보위부로 호송도중 달리는 기차에서 탈출하여 무산군에서 두만강을 넘어 연길시의 한 동료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세 번의 북송과 교화소 생활, 한창 배워야 할 나이에 저는 삶과 죽음의 극한점을 넘나들며 끝내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지금 이 시각도 탈북자 대다수는 한국으로 갈 기회를 기다리며 공안의 눈을 피해 중국 사회의 그늘진 곳을 떠돌고 있으며 북송이 되면 살아 나오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탈북자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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