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가 한국사람 이라구요?"

[윤호 기자]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필리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 '코피노(Kopino)'로 일컬어지는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가질 의문이 아닐까 싶다.

'코피노'는 원래 위 설명처럼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통칭했으나 한국인 아버지가 아이를 외면한 사례가 워낙 많아(3만 추산) 이제는 버림받은 아이들을 통틀어 뜻하는 말로 통하게 됐을 정도이다.

국내 사회복지기관이 필리핀에 설치한 코피노 지원센터의 아이들

이들의 실상은 수년 전 국내에 알려져 사회 문제로 부각됐다. 한국 남성의 잘못된 성문화와 무책임의 산물이라는 점이 지적됐다.

아버지로 부터 외면받은 코피노에게 그간 시민단체와 현지 교민단체들이 일부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또 참다못해 아버지 찾기에 나선 코피노와 그의 어머니가 제기한 양육비 청구 소송에서 최근 법원이 코피노의 손을 들어주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하지만 코피노 문제는 아직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못한채 한국과 필리핀 양국간 외교 현안으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최근 한국을 방문했던 필리핀 검찰총장이 한국측의 책임문제를 제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개인의 도덕성과 인권의식 제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정부도 이제 더는 손 놓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 많게는 3만명…부끄러운 한국 남성의 초상

코피노가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집계된 적은 없다. 다만, 국제 아동단체와 현지 교민단체 등은 코피노가 적게는 1만명, 많게는 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반면 현지 공관 등은 공식적인 통계를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민간단체가 파악한 숫자 보다는 상당히 적을 것으로 보고 있다.

코피노가 이처럼 많은 것은 한국 남성의 비뚤어진 성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필리핀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 133만9천명에 달한다. 필리핀을 찾는 전체 외국인 가운데 한국인이 24.99%로 가장 많다.

골프·스쿠버다이빙 코스에 현지 여성과의 성매매를 결합한 '음성적인' 남성 전용 관광 상품은 큰 인기이다. 여기에 한국인 사업가나 유학생이 현지 여성과 동거를 하다 낳은 아이를 버리고 떠나는 경우도 많다.

빈곤이 만연한 데다 사회 안전망이 부실해 많은 여성이 성매매로 생계를 꾸리는 현지 사정도 코피노 탄생의 한 원인이다.

특히 한국 남성은 피임기구 사용을 기피하고, 가톨릭 신자가 많은 필리핀 여성은 낙태를 죄악시하다 보니 코피노가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게 코피노 지원단체들의 설명이다.

코피노를 지원하는 사단법인 '탁틴내일' 이영희 대표는 "호주인이나 일본인이 현지 여성과의 사이에 아이를 낳으면 적은 돈이라도 매달 양육비를 보낸다는 게 현지인의 전언"이라며 "한국 남성이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가장 심하다고 한다"고 지적했다.

◇ 시민사회·법조계 "코피노 양육, 아빠가 책임져야"

지난해 8월 '코피노 아빠 찾기 사이트'라는 사이트가 개설돼 충격을 줬다. 코피노들의 아버지 사진을 올리고, 제보를 받아 해당 남성을 찾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이 사이트에는 현재까지 47명의 사진이 올라왔다.

이 사이트는 필리핀 현지에서 코피노 지원 단체인 'WLK(We Love Kopino)'를 운영하는 구본창씨가 만들었다. 구씨는 "아빠 찾기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의 주인공 중 연락이 닿은 사람은 29명"이라며 "본인이 직접 연락을 해오는 경우도 있고, 지인 등이 연락처를 알려주거나 연결을 해주겠다며 연락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구씨는 초상권 침해로 고소당하고 협박까지 받았으나, 사이트를 폐쇄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11일 오후 서울 동작대교에서 아동·청소년 성 인권 보호 청소년단체 탁틴내일과 성관광 근절 대학생 커뮤니티 A.B.C(Asian Bridge for Children)의 기획으로 열린 '코피노를 위한 희망걸음 캠페인'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필리핀 국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코피노의 아버지를 찾아주거나 양육비를 받는 것을 돕는 단체도 많다.

탁틴내일은 코피노 문제를 국내에 알리는 동시에 뜻이 맞는 변호사들과 협력해 현재까지 코피노 5명의 양육비 지원을 성사시켰다.

동방사회복지회는 코피노를 비롯한 필리핀 빈민층 아동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이스턴 칠드런 데이케어센터(주간보호시설)'를 필리핀 앙헬레스와 바기오 두 지역에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한국마사회도 국제구호개발 국제구호 비정부기구인 월드휴먼브리지와 함께 지난 1월 필리핀 다바오에 위치한 코피노 두드림 아동센터에서 봉사활동을 실시했다.

국내에는 코피노를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는 없다. 다만 법정 다툼까지 간 끝에 코피노와 필리핀인 어머니의 승소 사례가 계속 나오고 있다.

2014년에는 코피노 형제가 아버지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내 처음으로 승소했다. 지난해에는 코피노를 낳은 필리핀 여성이 한국인 남성을 상대로 낸 양육비 지급 소송에서 이긴 경우도 많이 나왔다.

◇ "여성을 쾌락 대상 아닌 인격체로 봐야…제도적 장치도 절실"

전문가들은 우선 한국 남성의 도덕성과 인권 의식을 끌어올리는 게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성재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여성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쾌락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코피노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며 이를 타파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성 교수는 "정부가 한국 남성들의 도덕성과 인권의식을 제고하기 위한 교육 시스템을 갖춰야 할 것"이라며 "한국을 찾는 코피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정책과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영희 탁틴내일 대표는 "해외 성매매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알려 외국에 나가면 성매매를 쉽게 할 수 있다는 한국 남성들의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현지에 파견된 국내 업체 직원이나 유학생에게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며 "여행업계도 성매매 가이드를 하지 않도록 자중하고, 당국의 처벌도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노력도 필요하다. 우리나라 정부는 코피노 지원정책을 마련하기는커녕 실태 조사도 한 적이 없다는 게 코피노 지원단체들의 지적이다.

코피노가 원인이 돼 우리나라와 필리핀 사이의 외교적 갈등으로 번질 소지도 다분하다.

최근 양국 검찰청의 수사 공조 문제를 협의하기위해 방한했던 클라로 아레야노 필리핀 검찰총장은 지난 9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인 관광객에게 성매매를 알선한 범죄조직의 배후가 한국인이란 점을 설명한뒤 "코피노 문제는 한국인 아버지가 부양책임을 지도록 양국이 협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필리핀 검찰총수가 한국인 성매매 관광 문제와 함께 코피노 문제까지 거론하며 한국 정부의 해결 노력을 공개적으로 촉구하고 나선 셈이다.

이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관심을 갖고 필요한 노력을 해나간다는 입장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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