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정권 시절 인사들의 회고록. 왼쪽부터 부시,럼즈펠드,체니,라이스의 회고록.
최근 2년 사이 부시 행정부 시절의 고관(高官)들이 잇달아 회고록을 출간했다. 부시 전(前) 대통령을 비롯,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 딕 체니 전 부통령, 그리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500~700페이지짜리 두툼한 책을 쓴 것이다. 필자는 이 책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부시 행정부의 8년과 겹치는 김대중(金大中), 노무현(盧武鉉) 정권 시절의 한반도를 미국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네 사람의 책에선 북핵(北核)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작년에 나온 조지 W. 부시 회고록 《결정의 순간들(Decision Points)》을 읽으니 ‘그가 김정일(金正日)을 정말 미워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재임시절 읽은 책들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것’으로 북한 강제수용소 출신 탈북자 강철환(姜哲煥)씨의 수기(手記) 《평양의 수족관》을 들었다. “강씨의 이야기를 읽고 많은 생명들을 파괴한 폭군(暴君)에 대한 거부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받쳤다”는 것이다. 

그는 또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보여준 한반도의 야간 위성사진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남한은 불빛이 훤한데, 북한은 암흑뿐인 사진이었다. 그는 북한주민들을 굶겨서 난쟁이로 만든 자가 비싼 코냑을 마시고 벤츠를 좋아하고 외국영화를 즐기는 호화판 생활을 한다고 분노했다. 부시는 김정일의 행태를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일부러 음식을 쏟아버리던 두 자녀의 어린 시절에 비교했다.


라이스의 김대중·노무현 평가

제1기 부시정권의 안보 라인. 왼쪽부터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 파월 국무장관, 부시 대통령, 럼즈펠드 국방장관.
부시 정부 8년간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으로서 북핵 문제 등 한반도 사태를 다뤘던 콘돌리자 라이스의 최근 회고록 《최고의 명예(No Higher Honor·미국 크라운 출판사)》는 잘 쓴 논픽션이다. 

유명한 러시아 전문학자인 라이스 씨는 조지 H. 부시(아버지 부시) 정부 시절에도 국가안보위원회(NSC)에서 일한 적이 있고, 스탠퍼드대학 교수로 돌아가 독일 통일 과정을 다룬 《독일은 통일되고, 유럽은 바뀌었다》라는 저서(필립 젤리코와 공저)를 남겼다. 회고록은 학자 출신 관료가 쓴 책답게 치밀하고 일화가 많으며 날카롭다. 8년간 만난 여러 나라 지도자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그는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을 상대하였는데, 호평(好評)이 아니다. 

라이스는 김대중 대통령을 ‘부드러운 매너를 가진 노(老)정치가’라고 표현하면서,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주의자(idealist)’라고 평했다.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정치인에게 하는 경우, 찬사(讚辭)라기보다는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란 뜻이 될 수도 있다. 

2001년 3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은 워싱턴에 가서 취임한 지 두 주(週)가 지난 뒤 부시 대통령과 처음 회담하게 된다.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미리 관계자 회의를 통해 회담에 임하는 미국의 입장을 정리한다. 햇볕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는 않겠지만 미국은 북한에 대해 전임(前任) 클린턴 정부와는 다른 접근법을 택한다는 방침을 정해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미국과 아시아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 균열”

다음날 새벽 5시 미혼(未婚)인 라이스 장관이 임시 거주하던 아파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부시 대통령이었다. 

“《워싱턴 포스트》 봤어요?”

“대통령 각하, 아직 못 봤습니다.”

“바깥에 나가서 신문을 갖고 들어오세요.”

배달된 신문을 갖고 들어왔다. 

“20페이지를 펼치세요.” 

부시의 목소리는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엔 콜린 파월 국무장관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다. 

파월 장관은 기자에게 ‘미국은 한국 측에 클린턴 정부의 대북(對北)접근 노선을 따를 것이라고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기사화되어 있었다. 

“내가 처리할까요, 귀관이 처리하겠어요?”

“제가 하겠습니다. 대통령 각하.” 

라이스는 즉시 콜린 파월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문을 보십시오.”

파월은 문제를 곧 알아차렸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자신의 말을 과장하였다면서 수습하겠다고 했다. 


이라크 內戰이 김정일을 살렸다

라이스는 김대중-부시 회담에 대하여 이런 평을 했다. 

<회담 분위기는 정중했으나, 북한을 다루는 방향에 대하여는 저세상만큼 다르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경우에도 북한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인상을 주었다. 우리는 (클린턴 정부가 북한과 합의한)제네바협약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하여는 아무 효과가 없고, 남한이 북한정권을 지탱해 주고 있다고 믿었다.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의 폭정(暴政)에 화가 나 있었는데, 왜 한국 정부는 이런 데 반응이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대중 방미(訪美)는 미국과 아시아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 균열하는 식으로 끝났다.>

라이스의 회고록 《최고의 명예》를 통하여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의 대북전략이 2005년부터 ‘대화모드’로 바뀐다. 

부시는 북한정권을 ‘악(惡)의 축(軸)’이라 부르고,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는 “나는 김정일 이름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집어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03년 초엔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에게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하여 필요하면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압박했다. 라이스도 회고록에서 북한정권을 ‘흡혈귀’에 비유했다. 부통령 딕 체니도 강경파였다. 

부시 대통령은 그러나 미군이 2003년 후반기부터 이라크내전(內戰)이란 수렁에 빠지면서 북핵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할 여력(餘力)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맨 처음 궤도 수정을 시사(示唆)한 이도 부시였다. 고위 전략회의에서 부시는 라이스 장관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의 생존을 허용한다면 김정일은 핵무기를 포기할까?”

라이스는 “독재자는 시험해 보지 않고선 알 수가 없다”고 답했다. 다른 참모가 그렇게 되면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라는 목표를 포기하는 게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니다. 수단을 달리한 레짐 체인지이다. 개방하면 그는 절대로 생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부시 정부는, 북한의 핵 포기와 한국전 종전(終戰)선언 및 미·북(美北) 수교를 교환하는 협상을 타진하기로 한다. 2006년 4월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부시는 김정일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이렇게 하여 6자회담과는 별도로 미·북 직접 대화가 시작된다. 주한미국 대사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이 미국 측 대표로 등장한다. 2년여 계속된 미·북 직접 대화는 그러나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이 기간에 북한정권은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했지만, 미국으로부터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동결한 북한자금의 해제, 테러지원국 해제 등의 양보를 받아낸다. 부시 행정부는 군사적 해결책을 포기하는 순간 중국의 협조도 받지 못하고 북한에 끌려 다니다가 임기를 마치고 만 것이다. 외교 협상이 장기화되면 원래 목표(이 경우는 북핵폐기 및 정권교체)를 상실하고 타협 자체가 목표로 되기 쉽다는 것이 새삼 입증된 셈이다.

라이스 회고록을 읽으면 북핵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중국만 고려했지 한국과 일본 정부의 의견은 거의 무시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친북(親北)정책을 쓰는 바람에 부시 정부로선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미국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무시하고 김정일만 상대한 느낌이다. 북한 핵개발의 피해 당사자인 한국이 미국보다 더 강경하게 나가야 미국도 편해질 터인데, 사사건건 북한정권을 싸고도니 6자회담에서 한국 스스로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때보다는 국력(國力)이 턱도 없이 약했던 시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공산세력과 미국 정부를 동시에 압박하는 목숨을 건 외교로써 한국의 생명줄인 한미(韓美)상호방위조약을 만들어 냈다. 김일성을 애써 무시하고 스탈린과 상대하려 했던 이 거인(巨人)과 김정일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미국 지도부의 경멸을 산 김대중, 노무현씨를 비교하면 국격(國格)이 반드시 국력과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부시, 장쩌민에 ‘일본 핵무장’으로 압박

라이스는 2001년 3월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미국과 아시아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 균열하는 식으로 끝났다”고 평했다.
라이스 회고록엔 미국이 중국을 압박, 6자회담으로 끌어들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2003년 3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6자회담을 중국에 제의했을 때 장쩌민 주석은 거절했다. 화가 난 부시 대통령이 전화를 걸었다. 장 주석이 과거 여러 번 말했던 대로 “미국이 북한에 보다 신축성 있는 접근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자 부시는 말을 끊고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는 강경파로부터 군사력을 사용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중국이 북한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통화 직후 중국은 6자회담에 동의했다. 6자회담은 그러나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했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유엔 안보리가 대북(對北)제재안을 통과시킨 직후 라이스 국무장관은 한·중·일(韓中日)을 방문한다.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라이스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하여 혹평(酷評)을 했다. 필자는, 최고위 외교관이 동맹국의 국가원수를 이렇게 표현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그는 노 대통령을 “(생각을)읽기 힘든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때로는 반미(反美)성향을 보여주는 말들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한 예로서 “그 전 방한(訪韓) 때 노 대통령은 나에게 강의를 했는데, 남한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제외교 무대에선 설령 반미 성향을 갖고 있더라도 이를 숨기거나 외교적 언사로 포장해야 하는 게 상식이다. 한국이 동맹국인 미국과 적(敵·북한)의 동맹국인 중국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려면 먼저 한미동맹을 해체하고 중립(中立)을 선언해야 한다. 말도 되지 않는 균형자론 강의를 들어야 했던 학자 출신 라이스의 울분이 회고록에서 묻어 나온다.


‘erratic nature’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종전선언을 종용했다.
그는 “다음 해엔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erratic nature)을 집약한 사건이 있었다”고 썼다. 미국인이 상대방에게 ‘erratic nature’라고 말한다면 주먹다짐이 일어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 APEC 정상회담에 참석, 부시와 회담하는 자리에서 ‘기자들 앞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북관계를 정상화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해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2005년 9월 19일의 6자회담 합의에 들어 있는 내용이라, 새로울 것이 없었다.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충실하게 그 말을 되풀이했다. 갑자기 노무현 대통령이 이렇게 질문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인지 모르겠는데, 부시 대통령께선 지금 한국전쟁 종전 선언을 언급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시 대통령, 그렇게 말했습니까?”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의 참견에 다소 놀랐지만 앞의 설명을 반복했다. 

“김정일이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핵무기와 핵개발 계획을 포기해야만 미국은 평화협정에 서명할 수 있습니다.” 

노 대통령이 또 요구했다. 

“김정일 위원장이나 한국 국민들은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라이스는 “모두가 당혹스러워했다”고 적었다. 충격을 받은 통역자가 통역을 멈추고 있으니, 노무현 대통령은 그녀를 보고 계속하라고 밀어붙였다. 부시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좀 퉁명스럽게 말했다. 

“더 이상 분명하게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 우리는 한국전쟁을 끝낼 것을 학수고대합니다. 김정일이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그의 핵무기를 없애야만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낼 수 있습니다.” 


‘예측불능’ ‘괴상한’

한국 측 통역이 끝나자마자 부시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생큐, 서!”라고 말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악수를 청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웃으면서 부시 대통령에게 감사했다. 라이스는 “그는 그 순간이 얼마나 괴상했는지(bizarre) 모르는 듯했다”고 썼다. 라이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의 예측불능 행태(unpredictable behavior)를 알고 난 이후엔 솔직히 말해서 한국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게 되었다.” 

그는 국무장관으로서 처음 2년간은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을 통하여 노무현 대통령을 ‘통역했다’(interpret)고 썼다. 노 대통령의 언동(言動)을 이해할 수가 없어 반 장관이 해설을 해 주었다는 뜻인 것 같다. 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옮긴 뒤엔 송민순(宋旻淳) 장관을 상대했는데, “그는 능력이 있고, 폭 넓은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지만 노 대통령의 비정통적인 생각에 反論을 제기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라이스는 그러나 “(사실은 한국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북한의 도발이 한국의 입장을 강경하게 만들었다. 대북제재에 대하여 한미 간 균열의 여지가 없었다”는 취지의 논평을 붙였다. 김정일의 도발로 노무현 정권이 왼쪽으로 가려야 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시드니 정상(頂上)회담은 노무현-김정일 회담(10월4일)을 앞두고 이뤄졌다. 그때 노무현 정권은 한국전쟁 종전선언이란 이벤트를 만들려고 애썼다. 그해 12월 대선(大選)에서 이명박 후보를 꺾기 위한 카드였다는 의심도 샀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유리한 논평을 끌어내려고 무리를 한 것 같다. 

노 대통령은 그해 10월 4일 평양에 가서 김정일과 10·4 선언에 합의하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남과 북은 현 정전(停戰)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미국은 ‘검증 가능한 핵 포기’ 이후에만 종전선언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는데, 노무현 정권은 그 조건에 대한 언급 없이, 즉 핵 포기와 상관없이 종전선언을 할 수 있다는 오해를 줄 만한 합의를 해 준 것이다. 미국이 기존 입장을 견지, 종전선언 구상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스라엘, 시리아-북한 합작 핵시설 발견

북한 영변원자로(왼쪽)와 이스라엘이 폭격으로 파괴한 시리아 원자로(오른쪽).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 다음 날 부시 대통령은 엄중한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나 핵물질을 다른 국가나 단체에 이전(移轉)한다면 미국에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 그 결과에 대하여 전면적인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 여섯 달 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책임자인 메이어 다간 부장이 딕 체니 부통령을 방문, 사진 자료들을 책상 위에 펴 놓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리아가 사막의 와디(乾川)에 짓고 있는 건물에 관한 이야기였다. 다간은, ‘알키바’라는 지명(地名)을 가진 곳에서 건설되고 있는 시설은 북한의 영변에 있는 흑연감속로와 꼭 같은 원자로로서 핵무기용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35년간 이런 원자로를 만든 곳은 북한뿐이므로 북한이 지어 주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체니는 최근 펴낸 회고록 《나의 시대(In My Time·스레시홀드 이디션즈 출판사)》에서 북한-시리아의 비밀 핵 개발 계획은 1997년부터 시작됐다고 썼다. 미국 정보기관도 북한의 관련 인사들이 자주 시리아를 방문하는 정황을 포착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공사는 2001년부터 시작됐다. 

체니 부통령은 모사드 부장의 설명을 듣고 확신을 가졌다. 다간 부장은 한 북한인의 사진도 보여주었다. 그는 영변의 핵연료 제조 책임자인데, 시리아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옆에 서 있었다. 두 번째 사진에서 이 북한인은 베이징(北京)에서 열리고 있던 6자회담에 북한 측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운명을 유엔에 맡길 수 없다”

이스라엘 측의 설명이 있은 후 부시 행정부의 안보 라인에선 수개월간 논란이 벌어졌다. 이스라엘 정부는 미국이 이 시설을 폭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체니 부통령은 찬성했다. 그는 시리아의 핵시설을 미국이 폭격하면 핵개발을 진행중인 북한과 이란에 미국의 의지를 확실히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두 나라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압박도 먹혀들 것이라고 보았다. 반대파들은 만약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군사적 공격을 하게 되면 시리아는 이라크 주둔 미군을 공격하는 등 보복에 나설 것이라고 반론했다. 

2007년 6월 19일 이스라엘 총리 올메르트는 워싱턴을 방문, 부시 대통령과 회담한 뒤 체니 부통령과 따로 만났다. 그는 “만약 미국이 공격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할 것”이라고 했다. 6월 말 고위정책회의에서 체니는 다시 한 번 미국이 이 핵시설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이 “부통령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편을 들지 않았다. 

부시는 이스라엘 정부에 ‘우리와 함께 외교적 방법을 쓰자’고 제의하기로 결심했다. 부시는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나오겠느냐”고 물었다. 라이스는 “올메르트 총리가 이 문제를 유엔에 갖고 가서 시설을 폐쇄하도록 국제적 압력을 넣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체니는 부시에게 “이스라엘이 군사적 공격을 할 것이다”고 말해 주었다. 7월 중순 부시는 미국의 방침을 올메르트에게 통보했다. 올메르트는 “그런 방법은 이스라엘엔 맞지 않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운명을 유엔이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손에 맡겨 놓을 순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원자로에 핵연료가 장전되기 전에 때려야 합니다.”

2007년 9월 6일 밤 이스라엘의 F-15 전폭기 편대가 시리아로 날아가 문제의 핵시설을 폭격하여 완벽하게 파괴했다. 부시 대통령은 군사공격 제안에 찬성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스라엘의 성공적 작전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올메르트는 이스라엘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믿은 바를 실천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폭격 사실을 비밀에 부치자고 미국에 제의했다. 이게 알려지면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이 보복작전에 나설 우려가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침묵하니 시리아와 북한도 얻어맞고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다. 이런 침묵이 오히려 파괴된 시설이 북한제 원자로였음을 확신시켰다. 

시리아는 건물터를 흙으로 덮고 철제 구조물을 지어 은폐했다.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 기술과 시설을 테러지원 국가인 시리아에 팔아 넘김으로써 부시 대통령이 설정한 금지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나 북한에 대한 별도의 응징을 하지 않았다. 체니는 회고록에서 “이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 의해 미국과 한국으로부터 기름을 얻고, 발전용 경수로도 신포에 건설 중인 그 순간에 농축우라늄 방식의 원자탄 개발을 시작하고 시리아에 핵무기용 원자로를 지어 주고 있었다. 


노무현, “인도핵은 되고 북핵은 왜 안 되나?”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만나 김정일을 향해 한국전 종전선언 약속을 해 달라고 조르던 2007년 9월 7일은 이스라엘 공군기가 시리아 핵시설을 폭격한 다음 날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미국 CIA는 한국의 국가정보원에도 시리아에서 북한이 원자로를 짓고 있다는 정보를 알렸다. 그럼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에게 김정일을 향하여 추파를 던져 달라고 부탁한 셈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라이스 국무장관이 회고록에서 노무현을 ‘변덕스러운 성격’ ‘예측불능의 행태’라고 묘사한 것이리라. 

주한(駐韓) 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2006년 8월 19일자 전문(電文)이 위키리크스에 의해 공개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8월 13일 자신에게 우호적인 몇 개 언론사 간부(editor)들과의 만찬 회동에서, “미국은 북한을 악랄한 존재로 여겨 문명의 규정(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을 강요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정성(公正性)의 문제”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북한은 인도의 상황과 비슷한데, 인도는 핵 보유가 용인되고 북한은 왜 안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은 또 “한국의 국방력 강화는 북한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적 태세를 갖추는 것”이란 견해도 피력했다고 이 전문은 보고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노무현씨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역할에 충실했는지 김정일의 대변인 역할에 더 충실했는지 의심할 권리가 있겠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과 만나니 긴장이 풀어져 솔직하게 심경을 밝힌 것 같기도 하다. 


최악의 한미정상회담

2005년 11월 한미정상회담 후 불국사를 돌아보는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내외. 버시바우 대사는 “경주 한미정상회담은 역대 한미정상회담 중 최악”이라고 평했다.
2008년 9월 16일 주한 미국대사 알렉산더 버시바우 씨가 미(美)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도 위키리크스에 의해 공개되었다. 버시바우 대사는 귀임(歸任)을 앞두고 김해로 내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이한(離韓)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눴다. 

노무현씨는 북한에 대한 견해를 주문받자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한이 무너지더라도 남북한의 통합은 불가능할 것이다. 남북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거나 정권을 흔든다는 공포심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이게 북한으로 하여금 보다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가도록 하는 최선의 길이다. 유일한 방법은 북한의 불안감을 줄여주는 것이다.”

버시바우 대사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우리는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우리는 북한 정권의 생존까지 보장할 순 없다. 그 문제는 정치적·경제적 개혁의 필요성에 직면한 북한 지도자들에게 달렸다.” 

퇴임한 버시바우 대사는 2008년 12월 5일 워싱턴의 한미경제연구소(KEI)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2005년 11월 경주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부시 대통령을 상대로 한 시간 넘게 논쟁을 벌였다. 노 전 대통령은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의 북한 계좌에 대한 미국의 동결조치에 대해 크게 우려하여 부시 대통령과 심한 논쟁을 벌였는데, 역대 한미 정상회담 중 최악이었다.”


체니의 ‘참담한 순간’

對北 강경론을 일관되게 고수했던 체니 전 미국 부통령.
8년간 부시 행정부의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의 회고록 《나의 시대》 15장은 제목이 ‘좌절(Setback)’이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정권을 ‘악(惡)의 축(軸)’으로 규정, ‘레짐 체인지’(정권교체)까지 추진하다가 임기 말엔 핵시설 검증 약속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해 줌으로써 ‘부시 독트린’을 스스로 부정해 버린 것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체니는 이 굴욕적 사건의 책임을 콘돌리자 라이스와 대통령에게 돌렸다. 

2008년 6월 26일(미국 시간) 북한은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검증용 핵시설 목록을 전달했는데, 우라늄 농축과 핵확산에 대한 기록이 빠졌고, 플루토늄 재처리 활동에 대한 기록도 충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시 대통령은 즉각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할 뜻을 의회에 통보했다. 체니는 “검증절차에 대한 합의가 부실하다”고 따졌고, 라이스 장관은 “6자 회담 미국 측 대표인 크리스 힐이 북한 측과 구두로 우라늄 농축에 대한 별도의 검증 방식에 대하여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체니가 더 추궁하니 ‘쌍방 합의’가 아니라 힐 대사의 비망록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라이스는 의문을 제기한 부시 대통령에게 “외교에선 반드시 문서합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고 변명했다. 일본 정부도 미·북이 합의한 검증방식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부시 대통령은 2008년 10월 10일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 주기로 결정했고, 다음 날 라이스는 그 문서에 서명했다. 체니는 회고록에서 “참담한 순간이었다”고 썼다. 

“이것은 부시 독트린을 부정하는 것이고, 클린턴 시절의 실패한 접근방법을 답습하는 꼴이었다.”

북한정권은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빠지자마자 “검증은 영변의 플루토늄 원자로에 한한다”고 선언했다. 12월 11일엔 어떤 ‘구두(口頭)약속’도 무시하겠다고 했다. ‘구두약속’을 믿고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빼 준 부시 행정부는 임기를 대북굴욕으로 마감했다. 


회담을 위한 회담

그 뒤 북한은 2009년 5월에 두 번째 핵실험을 했고, 작년 10월엔 미국 전문가를 불러 영변 단지 내 농축우라늄 시설을 보여주었다. 2011년 2월 미국의 짐 클레퍼 국가안보국(NSA) 국장은 상원에서 증언하기를, “북한은 영변에 농축우라늄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바, 시설의 규모 등으로 미뤄 상당기간에 걸쳐서 농축을 시도했다”고 했다. 그는 또 “농축시설이 다른 곳에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부시 행정부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對北 강경론자였던 체니는 부시의 실패 교훈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한국의 대북정책을 맡은 이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한다. 

첫째, 정책의 목표를 잃어선 안 된다. 국무부는 교섭과정에서 北核폐기가 아니라 북한과 합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말았다. 

둘째, 강한 입장에서 협상을 해야 한다. 원칙을 지켜야 하고 필요하다면 회담을 깨고, 군사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셋째, 금지선을 지켜야 한다. 북한이 시리아에 영변형(型) 핵무기용 원자로를 수출한 사실을 알고도 응징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넷째, 전략적으로 사고(思考)해야 한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을 때와 그들이 시리아에 원자로를 지어 주고 있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중국을 앞세워 강한 압박을 넣었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쳤다. 

다섯째, 미국은 동맹국과 함께해야 하는데, 일본과 한국을 소홀히 했다. 

여섯째,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북한은 제네바 비핵화(非核化) 협정을 맺은 뒤에도 우라늄 농축과 대(對)시리아 원자로 수출을 했다. 이런 수법을 우리한테도 적용했다. 


럼즈펠드,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단에서 친구 이름 발견

럼즈펠드 전 미 국방장관은 집무실 벽에 한반도의 밤을 찍은 인공위성 사진을 붙여 놓았었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장관은 가장 젊은 나이에 국방장관이 된 기록(포드 대통령 시절)과 가장 늙은 나이에 국방장관이 된 기록(부시 2세 시절)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을 기획하고 지휘했다. 그가 작년에 내놓은 회고록 《아는 것과 모르는 것들》엔 한국과 관련하여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그는 국방장관 시절에 집무실 벽에 한반도의 밤을 찍은 인공위성 사진을 붙여 놓았다. 휴전선 남쪽은 환하고 북쪽은 캄캄하다. 평양에서만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럼즈펠드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군과 유엔군의 희생 덕분에 그런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고 꼬집으면서 2003년 방한 때 있었던 일을 소개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용산의 전쟁기념관을 방문, 헌화(獻花)했는데,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을 같이 한 딕 오키퍼의 이름을 전사자(戰死者) 명단이 적힌 벽면에서 확인했다고 한다. 오키퍼는 한국전선에 참전했다가 1953년 7월 27일의 휴전 하루 전에 전사했다. 

당시 한국 국회는 이라크 파병 문제로 토의를 벌이고 있었다.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꼭대기 층에서 럼즈펠드에게 다가온 한 젊은 한국 여기자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우리가 지구를 반(半) 바퀴나 돌아서 이라크에 한국의 젊은 남녀들을 파견, 죽고 다치도록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이 자신의 감정을 건드렸다고 한다. 친구 오키퍼 생각도 났다. 그는 여기자에게 이렇게 반문(反問)했다고 한다.

“50년 전 미국은 왜 지구 반 바퀴나 돌아서 이 나라에 그들의 젊은 남녀들을 보내야 했나요?”

<우리는 화려하고 높은 서울의 빌딩숲, 자유 한국인의 근면성과 기술을 보여주는 증거물을 내려다보았다. 저 풍요는 다른 사람들의 용기와 희생을 통하여 한국인들에게 다가온 것이다. 나는 생동하고, 자유롭고, 번영하는 도시가 보이는 창(窓)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게 바로 나의 답(答)입니다.”> 

럼즈펠드는 멍청한 질문을 한 기자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라이스, 이명박 대통령의 “북한 동포는 우리 형제”라는 말에 감동

2007년 2월 25일 취임식 후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이 대통령의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에 감동받았다고 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자신의 회고록 《최고의 명예》에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혹독하게 비판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을 호평했다. 2008년 2월 말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한국계(系) 미국인 하인스 워드(미식축구 선수)와 함께 참석한 라이스 장관은 대통령을 잠시 만났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동포를 동정하는 발언을 열정적으로 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입니다”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했다는 라이스는 그 몇 년 전 한 한국 관리가 보여준 반응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고 썼다. 이 관리는 “통일이 왔을 때 ‘두뇌가 파괴된 난쟁이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비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라이스는, “미 의회에선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했으나, 한국에 협력자가 없는 상태에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썼다. 예컨대 노무현 정권은 대북(對北)방송의 능력을 향상시키자는 건의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주민들의 인권문제에 큰 관심을 가진 것을 보고, 라이스 장관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우리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날 밤 라이스 장관은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이명박 대통령은 ‘아시아의 자유’를 주제로 한 각하의 정책 수행에 있어서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라이스는 ‘두 사람이 함께 일할 시간이 짧다는 게 안타까웠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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