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환자 신라에서 궁예는 3대 영웅으로 떠올랐다. 견훤과 궁예, 왕건이 세 영웅 중에 500년 새 왕조를 개창한 이는 군사력과 정치력과 덕을 아울러 갖춘 왕건이었지만, 그 기반은 대부분 궁예의 후(後)고구려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가 처음부터 포악했던 건 아니다.

“(궁예는) 부하와 동고동락했다. 일할 때는 함께 일하고 쉴 때는 함께 쉬었다. 주든 빼앗든 공평무사했다. 그래서 민초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한편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했다.”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권력은 사람의 본성을 드러낸다. 1인 지배가 확실해지자, 그때부터 궁예는 자신을 인간신(人間神)으로 확신한다. 문무겸전의 천재라고 선언한다. 왕의 권력과 부처의 권위를 동시에 주장한다. 한때 세달사(世達寺)에서 중노릇하던 풍월로 불경이랍시고 스무 권이나 저술하고 미륵불로서 횡설수설 저자 직강(直講)한다. 하루는 도저히 못 참고 한 승려가 핀잔을 준다.

“개소리!”

궁예는 즉시 몽둥이로 그를 때려죽인다. 관심법(觀心法)을 터득했다며 누구든 마음에 안 드는 자는 즉흥적으로 죄를 창작해서 때려죽인다. 심지어 직언하는 부인강씨(夫人康氏)에게도 음행의 죄를 덮씌워 그녀와 그녀 소생의 두 아들마저 부끄러운 부위부터 때려서 죽인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절요]는 궁예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간단히 기술하는데, [고려사]는 폭군이 산속으로 도망가서 이틀 밤을 보내고 배가 너무 고파서 밭에서 보리를 훑어 먹다가 부양(평강)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증언한다.

(信宿飢甚偸截麥穗而食 尋僞斧壤民所害)

 

정조 사후 이씨조선은 급격히 왕조 말기 증상을 보인다. 60년 세도정치로 주변 어느 나라든지 입김만 불면 훅 커질 촛불 신세로 전락한다. 23대 순조는 11살, 24대 헌종은 8살에 왕으로 옹립된다. 세도정치에 이용되기 딱 좋은 나이다. 나이로 보면, 25대 철종은 자립하기에 충분했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할 때보다 1살 많은 19살에 즉위했으니까! 그러나 그는 유배되어 강화도에서 5년간 농사짓고 나무하던 무지렁이였다. 상하관계가 엄격하던 성리학의 나라에서 그는 헌종의 7촌 아저씨였지만, 헌종 뒤를 이어 왕으로 옹립된다! 이유는? 허수아비 노릇 시키기에 딱 좋기 때문이었다. 만백성에게 세 왕은 여전히 하늘이었다. 그러나 세도가에게 세 왕은 한갓 궁노(宮奴)에 지나지 않았다. 김정은처럼 7성급 호텔에서, 디즈니랜드급 낙원에서, 아스펜급 스키장에서 주지육림에 뒹굴게 해 주는 대신, 1분 1초의 여유도 없는 계획표에 따라 수많은 금기 속에서 말과 행동 심지어 생각까지 통제된 노예였다.

 

조선 500년 평화는 중국 한나라 400년 평화처럼 후유증이 아직도 계속된다. 너무 길었던 한나라 400년 평화 후유증은 당나라가 수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400년 전쟁으로 비로소 치유되었다. 특히 한나라 400년 평화의 마지막 100년은 전쟁보다 훨씬 못한 상황이었다. 600년 전쟁의 끝판왕 한고조 유방이 세운 권위는 여전했기 때문에 왕조의 권위를 사칭한 탐관오리에게 두 눈 번히 뜨고 맨 주먹의 백성들은 그냥 당했다. 조선도 마지막 100년은 전쟁보다 참혹한 평화의 질곡(桎梏)에 시달렸다. 일제시대와 6.25동란과 김씨왕조 60년 악몽으로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씨조선 500년 평화의 후유증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여전히 2천만이 전쟁보다 못한 평화의 질곡에 신음하고 있다. 다행히 38선 이남은 자유와 풍요를 넘치게 누리지만, 북쪽에는 털끝만큼의 영향도 못 미친다.

 

김씨공산왕조도 마침내 왕조 말기 증상이 급속히 커지고 있다. 스스로 망하고 있다. 말년의 궁예와 똑같은 짓을 3대에 걸쳐 계속하는 데도 안 망했지만, 이제 스스로 망하고 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궁예는 군사력을 완벽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왕건이 스스로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민심만 모아지면 언제든지 폭군을 몰아낼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순조 이래 100년간 조선은 군사력이 부족국가 수준도 안 되었지만, 완벽한 군사력 통제로 왕건처럼 또는 이성계처럼 왕조를 거꾸러뜨릴 군사력을 보유한 독자세력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외국에 망할 때까지 전쟁보다 참혹한 평화의 질곡을 견뎠던 것이다.

 

김일성왕조는 현재 군사력 자체로 보면 궁예왕조급이지만, 독자적 군사력 보유자 존재 유무로 보면 조선 말기와 비슷하다. 왕건에게 쫓겨나기 전의 궁예처럼 김일성과 김일성2세는 폭력과 거짓으로 왕의 권력과 부처의 권위 곧 왕권과 신권이 결합된 유일지배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김일성3세는 폭력과 거짓으로 왕조를 이끌기는 하지만, 너무나 갑자기 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에 여자 하나 마음대로 고르지 못한다. 철종처럼 모든 것은 그의 재가를 받아 이뤄지지만, 그것은 서로 버성기는 몇몇 집단이 제각각 시키는 대로 서로 모순되는 명령의 남발이다. 경제는 중앙권력이 겨우 평양일대에만 미치지만, 군사와 문화와 정치는 여전히 전국에 미쳐서 왕조를 거꾸러뜨릴 독자세력이 없다. 장성택이 거기에 제법 근접했지만, 군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두 형이 2006년, 2009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제거된 걸로 생각됨) 궁예의 처자식이 궁예의 몽둥이에 맞아 죽었듯이 속절없이 처형되었다.

 

왕조 말기 증상을 뚜렷이 보이고 있지만, 김일성왕조는 군사력이 한국과 일대일로는 최소한 비길 정도가 되어서, 대역전을 노리고 있다. 이에 적극 동조하는 세력이 한국의 친북좌파다. 한국의 친북좌파가 폭력과 선동으로 법을 있는 대로 파괴하는 내부의 적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한, 김일성왕조는 최후의 대역전을 노린다. 한국의 친북좌파는 몸은 한국에 있지만 영혼은 현실과 환상이 뒤범벅된 사회주의 지상낙원에 있기 때문에, 그런 강철신념으로 출세가도를 달렸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자식을 절대 북한에 보내지는 않지만, 스스로 변할 수가 없다. 친북좌파가 대오각성하여 홍유와 배현경과 신숭겸과 복지겸이 되어, 김정은을 보리밭에서 헤매게 만들 수는 없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애국자는 피에 굶주린 김정은과 그 뒤의 세도가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정의에 목마르고 이밥과 소고기에 굶주린 북한주민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돈을 내어놓는 정통우파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은 내부 모순 해소용으로 김씨왕조가 이판사판으로 벌일 전쟁으로 진검 승부를 가릴 수밖에 없다.

 

한국의 친북좌파 다음으로 자유통일의 걸림돌은 북한의 하늘 중국이다. 서독의 콜이 소련의 고르바초프를 열중쉬어 시켰듯이 한국은 중국의 습근평을 열중쉬어 시킬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핵 펀치도 당연히 빌어야 한다. 자체 군사력을 더 키워야 하고 국민을 한 마음 한 뜻으로 자유통일 전선 앞으로 보무당당하게 걸어가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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