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권력서열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표면상 드러난 북한의 공식서열대로 항상 점친다. 그런 식대로라면 현재 북한의 제2인자는 당연히 김영남 최고상임위원회 위원장이어야 한다. 북한의 권력서열을 분석할 때에는 당 조직지도부의 핵심 지위 순서대로 봐야 정답이다.
 
북한의 폐쇄성은 당 조직지도부의 비밀에 있으며, 그래서 그 내부적 실권에 대해서는 대외적 자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북한의 대외자료를 근거로 북한을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이 최룡해를 2인자라고 헛짚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또한 당 조직지도부는 북한의 상위권력을 집중적으로 장악, 관리하는 부서여서 그 인사권에 해당되지 않는 대부분의 일반 탈북자들은 더더욱 알 수가 없다.
 
고위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현재까지 종합된 당 조직지도부는 5개 부서와 38개 과로 구성돼 있다. 솔직히 이에 대해서도 현재까지 남한에 온 고위 탈북자들 중 정확하게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장 근접한 해명이 있다면 북한 외교관으로 근무하다가 1997년 탈북한 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현성일 박사가 쓴 논문 '북한의 국가전략과 간부정책의 변화에 관한 연구'이다. 당 조직지도부가 북한의 실제 최고권력부서라는 것을 체계적으로 밝힌 것은 아마 그 논문이 최초이면서도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다.
 
그만큼 당 조직지도부는 김정일의 대체권력으로 북한체제 위에 군림하면서도 그 실체를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그 주된 이유는 북한의 모든 권력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장악하고 조정하는 통제와 결정의 과정을 대외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현재 당조직지도부의 권력서열을 본다면 조연준은 조직부 제1부부장이고 황병서는 군담당 제1부부장이다. 조직지도부 내 담당 부부장들이 제1부부장 직제로 나누어지는 것은 김정일 생존시 담당 부서의 부장직제를 공석으로 비워두웠기 때문이다. 장성택의 행정부는 해체되어 조직지도부 내 다른 과들에 편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조연준의 조직부와 황병서의 군, 그 외 간부부를 아우르는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김경옥이다. 북한의 제2인자는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김경옥으로 봐야 한다. 김경옥의 당 조직지도부에는 조직부, 행정부, 간부부, 3대혁명소조지도부, 63부가 있다. 
 

0 조직부
 
조직부 안에는 당원등록과 정책검열과 규약기구과, 10대원칙지도과, 중앙 당 생활지도과, 지방 당 생활지도과, 재외지도과, 13과, 8,9과, 99과, 통보과, 종합과가 있다.
 
당원등록과는 북한의 모든 당원등록과 함께 노동당의 당증 발부 재량권과 분배의 권한을 갖고 있다.
 
정책검열과는 간부검열과와 당원검열과로 나누어져 말 그대로 검열과 처벌 수위를 결정한다.
 
정책검열과 안에는 1과부터 15과까지 존재하는데 특히 4과는 중앙 당 간부들만의 비리를 추적하는 일종의 암행어사이다.
 
규약기구과는 당 규약 규정은 물론 그에 맞는 기구편성 및 관리를 담당한다.
 
10대원칙지도과는 당의 10대원칙 규범에 맞는 지도와 관리를 전담한다.
 
중앙 당 생활지도과는 중앙당, 군, 내각을 비롯한 북한 내 모든 중앙기관들의 당 생활지도를 담당한다.
 
지방당 생활지도과는 지방당 생활지도를 담당한다.
 
재외지도과는 해외교포조직 관리 및 지도를 담당한다.
 
13과는 조선인민군총정치국과 총참모부 당 지도를 전담한다.
 
8.9과는 만수대의사당 및 재정경리 부분을 지도한다.
 
99과는 군수공업부를 담당한다.
 
통보과는 지도자의 결정, 및 비준사안을 전달한다.
 
종합과는 각 성들이 해당 직속당인 중앙당 부서들을 통해 보고하는 제의서들을 종합하는 역할을 한다.  
 

0 행정부
 
행정부는 인민보안부, 국가보위부, 재판소, 검찰소를 담당하는 사법부서이다.
 
장성택의 행정부 권한은 김정일 생존 때부터 인민보안부에만 한정되고 기타 나머지 사법기관들은 당조직부를 거쳐 김정일이 직접 주관했다.
 
 
0 간부부
 
간부부는 1과부터 11과까지 나누어져 있는데 1,2과는 본부당, 3과는 지방당, 4과는 군부, 5과는 호위국, 6과는 국가보위부, 7과는 인민보안부, 8과는 사법부, 9과는 내각, 11과는 대남부서 내 간부들의 인사 및 해임 권한을 갖고 있다. 11과에는 130실이 있는데 여기서는 대남공작원들의 인사 및 파견 적합성 심사를 한다.
 

0 3대혁명소조부
 
3대혁명소조부는 사상, 기술, 문화의 광범위한 범위 안에서 당적 요구와 감시를 한다. 3대혁명소조지도부는 1980년 말 3대혁명소조지도과로 축소됐다가 2002년 이후 북한의 시장화를 감시 관리 할 목적으로 다시 당 조직지도부 내 일개 부서로 부활했다.
 

0 63부
 
63부는 호위사령부 담당 부서로서 이 부서의 실체에 대해서는 중앙당 내에서도 비밀조직으로 분류돼 있다.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도 일거에 숙청한 북한의 괴물인 당조직지도부는 과연 어떤 조직인가?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자면 단순히 북한의 권력구조에 대한 설명에 앞서 김정일이 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어떻게 유일권력을 장악했는가에 대한 과정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그에 대해 뉴포커스가 분석 정리해본다.
 
 
1. 초기 북한 정권의 양대 권력은 당, 내각이었다.
 
필자는 북한 통전부에서 근무할 당시 '김조실록' 편찬조에서 일했었다. 당시 김정일이“김조실록” 편찬을 지시한 배경은 이렇다. 김일성 사망 3주기가 되던 1997년 7월 북한 정권은 김일성의 생일인 1912년 4월 15일을 원년으로 주체 년호를 새롭게 제정했다. 김 씨 일가의 영원한 세습정치를 위해 김일성의 생일을 시작으로 북한의 세월까지 인위적으로 바꾼 것이다.
 
김정일은 북한의 민족성을 '김일성민족'으로 명명하고 그 시원부터 전체의 당위성을 조작하려면 남한이나 해외의 민족성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김일성 집중민족주의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이나 재외교포들의 포괄적 내용도 일일 기록으로 조작해야 했다.
 
그 자료들은 대남 포위망 형성 차원에서 교포사회까지 맡아보는 당 통일전선부만 갖고 있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역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 보관한 당 문헌연구소의 비밀문건을 사회 일반 작가들에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여 업무상 보안이 철저할 수밖에 없는 대남공작부서인 통전부 작가들에게 '김조실록' 편찬을 지시하게 된 것이다.
 
편찬조가 연구원, 작가들로 구성된 목적도 단순히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수령주의(수령신격화)창작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통전부가 편찬한 김조실록은 북한 TV에서'김일성, 김정일동지 혁명실록을 펼치며'라는 제목으로 매일 연재를 하고 있다. 필자가 김조실록 편찬조에서 봤던 1960년대 말까지 북한의 핵심부서는 내각이었다.
 
각 경제담당 성들은 물론 인민보안부의 전신인 사회안전성을 비롯하여 군 조직인 민족보위성도 갖고 있는 실체적 정권기능의 내각이었다. 다른 동구권사회주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구 소련의 맑스-레닌주의 지배를 받아 당과 내각이라는 양대 권력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북한이 당의 유일적 영도만을 주장하는 절름발이 정권으로 변한 것은 김정일이 당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 명목으로 실제적인 김정일 당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가 만들어지면서부터이다.
 

2. 당 조직지도부의 부상으로 내각권력 무너져
 
현재 북한의 내각은 식물내각이다. 그 이유는 김정일의 당 조직지도부가 북한 내 모든 인사권과 권능을 장악하면서부터이다. 내각의 붕괴는 엄연히 전통권력과 질서에 대한 부정이었고,그 과정의 권력갈등은 종파투쟁이란 명분의 숙청으로 이어졌다. 부자간에도 권력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김정일의 잔인한 정치적 야심은 생모인 김정숙이 사망한 8살 때부터 고아처럼 자라지 않으면 안 되었던 동심의 굴곡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인이 사망 한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남침전쟁을 일으킨다. 그 동란을 피해 김정일은 아버지와 헤어져 3년의 피난세월을 보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양으로 돌아왔지만 집안은 평화롭지 못했다.
 
1954년에 이복동생인 김평일이가 태어난 것이다. 그의 어머니인 김성애는 아버지 곁에 늘 붙어 다니던 여비서 출신이었다. 그때부터 김정일이 가졌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란 전후의 나라일로 밖으로만 떠도는 바쁜 아버지와 반면 계모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그 사이 성인이 된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1964년 졸업하게 된다. 당연히 집안의 장남으로서 공식적인 후계지위의 첫 걸음을 떼야 할 때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일년 전인 1963년 김일성은 김성애와 공식 결혼을 해버린다. 그 통에 수령의 부인이 된 김성애의 정치적 지위도 급부상하게 된다. 잇달아 1966년 중국에서 모택동 부인인 강청이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면서 북한 내에서도 김성애가 권력정면에 등장하게 된다.북한 권력층들은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를 중국의 강청이처럼 신봉하며 그녀의 아들인 김평일을 노골적으로 후계자로 점 찍고 있었다.
 
김정일에겐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빨치산 동지들부터가 첫째가는 정치적 적수였던 셈이다. 북한의 공식자료들은 김정일이 당 조직부에서 첫 당 사업을 시작했다고 기술하지만 그것은 김정일의 당적 영도업적을 부풀리기 위한 조작이다. 그때의 북한 권력층은 김성애의 조언에 더 귀를 기울이던 상황인데다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까지 가세하여 반대하는 바람에 실은 김정일은 조직부가 아닌 당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김정일은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전부 직위를 이용하여 김일성 신격화와 빨치산 출신 권력가들의 항일역사 왜곡선동으로 분위기를 역전시킨다. 김정일의 주도로 만들어진 월간잡지 '항일무장투쟁 참가자들의 회상기'가 전민 필독서로 지정 될 정도였다. 김일성과 항일투사들의 동상도 그때부터 하나 둘 세워졌다. 선전부의 경험은 김정일에게 공산주의 이념국가의 통치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감성독재의 자질과 영도의 방법을 깨우쳐 준 중요한 계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북한의 절대 신이 아니었다. 1968년 말에는 민족보위상(국방장관)이던 김창봉의 주도로 무장 쿠데타가 벌어질뻔한 직전의 상황까지 벌어지게 된다. 김일성은1969년 1월 김창봉과 그 반란세력을 숙청하는 조선인민군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최현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한다. 최현은 그 보답으로 수령절대주의와 장남 세습의 민족 전통성에 충성했다.
 
총소리가 나는 곳엔 최현장군이 있다고 할 정도로 다혈질이었던 그가 아니었다면 김정일은1969년 여름에 열린 비공개 당 확대회의에서 비로소 당 조직부 과장 직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일이 최현의 아들 최룡해를 평생 자기 왼팔로 둔 것도 바로 그런 인연 때문이다. 또 다른 오른팔은 오극렬이다.
 
오극렬은 김정일보다 나이가 10년이나 위였고 그 당시 공군대학 총장이었다. 오극렬은 이미 권력 일선에 선 군 장성의 위치에서 김정일의 정치적 조언자 역할에 충실했다. 그에 비하면 김성애의 파워는 대단했다. 김성애의 오빠 김광협은 내각 부수상이었고,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도 형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들 중 대부분도 지금은 나이가 어려서이지 장차 수령의 후계자는 김성애의 아들 김평일이라고 아예 대놓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김정일은 그 암벽을 넘을 방법을 중국 문화대혁명의 홍위병 조직을 모방한 3대혁명소조에서 찾았다. 중국의 홍위병은 자본주의적, 수정주의적인 것들을 척결한다는 게 목적이었다면 북한의 3대혁명소조는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혁명이라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 둔 젊은 젊은이들로 구성된 홍위병식 3대혁명소조가 전국에서 조직됐다. 그 소조원들의 주요 과녁은 지방관료들의 부정부패였다. 그 지방권력의 비리와 연계된 중앙 간부들이 하나 둘 제거되면서 김정일의 권력은 점점 커지게 됐다. 하여 1973년 김정일은 당 조직부 안에 있는 3대혁명소조 총책임자가 됐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당 절대주의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그 이유는 김일성은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와 민심의 복구를 위해 공산주의 과도기인 사회주의 완성은 경제의 우선이라고 봤다. 그래서 내각정치를 했고 대부분 최 측근들이 각 성의 상으로 분포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정권 안에서 김정일의 존재란 내각 밖의 노동당이라는 다른 기관의 직원일 뿐,  최현을 제외한 다른 상들이 봤을 때 후계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당 권력을 키워 대항할 수밖에 없었던 김정일은 그 돌파구를 주체철학에서 찾았다. 수령이 위대하려면 맑스-레닌주의처럼 김일성주의가 있어야 하고, 그 이념의 정당으로 나라를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수령은 당을, 당은 인민을 영도한다는 김일성주의는 1973년부터 당의 만능무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김일성주의는 인민의 사상이 되고 그 신봉은 당원의 양심이 됐다.
 
그것을 어길 경우 누구이든 작은 실수라도 3대멸족 연좌제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다. 사회안전성 소속이던 정치감찰조직을 국가보위부로 독립시켜 김정일의 당 조직부 직속에 둔 것도 그 시기이다.. 때마침 197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의 주범인 강청이 구금되면서 김정일의 당 제일주의 노선은 더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당적 영도확립 차원에서 내각의 인사권을 회수하고 사상감시 명목으로 지도관리기능도 심화시킨다.
 
 
3. 1970년부터 북한의 양대 권력은 당 조직지도부와 선전부
 
1970년대부터 김정일은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 실현은 조직력과 선전이 필수라며 당 조직부와 당 선전부를 급 부상시킨다, 군은 물론 지방 말단 직장의 당위원회에도 조직부와 선전부를 두고 김일성 신격화 잣대로 모든 당원들의 정치적 평가와 감시를 했다. 그 모든 업무 총괄을 위해 당 조직지도부의 권한도 대폭 확대한다.
 
김일성이 김정일의 당 권력 팽창을 방임했던 것은 김일성주의 정당으로 맹신하며 선전하는 수령신격화에 스스로 눈이 멀어서였다. 아버지가 효도만한 충성이 없다고 착각하는 사이 아들은 은근히 유일 비준시스템도 구축했다. 처음에는 당 총비서의 사업부담을 줄이고 편의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녹음 카세트 문건으로 시작했다.
 
나중엔 당 조직부에 모든 결제를 집중시켜 걸려 낸 제의서만을 당총비서에게 보고하도록 제도화 해버린다. 그렇듯 제의서 집중은 곧 권력의 집중으로 이어져 1980년 김정일은 마침내 당 총비서 유일지도체제 명목으로 사실상 당 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김정일은 2인자의 권력을 쥐자마자 '곁가지 청산'(나무가 곧게 자라자면 곁가지를 잘라줘야 한다는 뜻에서 김일성의 친인척들을 지칭)원칙을 적용하여 자기의 세습을 반대했던 삼촌 김영주, 계모 김성애를 자택연금 시켰다. 또한 1981년에는 자기의 세습을 반대했던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들인 항일투자 자녀들을 아예 중앙당에 받지 말도록 당 조직부 내부 인사원칙까지 만들도록 했다.
 
김일성의 항일동지들이 하나 둘 제거되고, 당 조직부 인사억제 내부규정 비밀까지 알려지자 빨치산 출신 권력가들은 1982년 4월 15일 김일성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집단적으로 이견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김일성은 주석부의 주인일 뿐, 더는 당 총비서도, 국가주석도 아니었다.
 
당조직부 유일비준제도로 북한 내 모든 권력이 김정일에게 빈틈없이 집중돼 있었고, 그 핵심의 요소요소들엔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 자녀들이 아닌 김정일의 김일성종합대학 동기들로 채워져서였다. 그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김일성은 자기의 빨치산 동지들을 만나는 것조차 사전에 당 조직부의 결제를 받아야 하는 외로운 처지가 돼 버린다.
 
김일성의 권력이란 주석 겸 당 총비서로서 인민에게 보여지는 대외성 현지시찰과 외교권력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자기의 경호부대인 호위사령부 1호총국이 당 조직부 소속이어서 근접경호가 아닌 근접감시 상황에서 가능한 권력이었다. 북한이 1980년 10월에 열렸던 6차 당 대회 이후 2004년까지 20년 넘게 단 한 번도 당 대회가 열리지 않은 것도 김정일이 김일성의 당 총비서 권력인 정치국회의 소집 권한 자체를 무력화시킨 결과 당 총비서 권력이 공황상태에 빠져서였다.
 
그때부터 북한의 권력구조는 아버지가 명예직이고 아들이 실권이듯 공식지위의 순리보다 김정일의 신임도에 따라 대내적 파워가 인정되는 이중구조로 고착됐다. 즉 아버지 세대의 고령의 인물들에게는 공개직함을 주어 명예를 주는 대신 종적 체계를 구축하고 인사권이나 행정지도권 같은 대내실권은 실세 형 최 측근들에게 주어 횡적 체계를 유지했다.
 
공개직위는 주되 실권을 주지 않고, 실권은 주되 공개직위를 주지 않았던 것이 바로 김정일의 당 조직비서 일인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십자형 통치 기술이었다. 박의춘 외무상은 허울 뿐이고, 강석주 제1부상이 실권자였던 북한 외무성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김정일의 당 조직부 앞에선 김일성의 당 총비서 권한도 얼마나 허무했던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있다.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상좌로 근무했던 현 탈북자동지회 최주활 회장은 이렇게 증언했다.
 
'1980년대 중반 소련고위급 군사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였다. 대표단의 근황이 궁금했던 김일성은 자기의 군사고문이었던 4성장군 김두남을 시켜 인민무력부 대외연락부에 방문스케줄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대표단의 숙소가 인민무력부 초대소라는 사실을 안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국가수반 급으로 우대 해주는 것이 어떠냐며 “백화원”(북한 정권에서 운영하는 수반 급 초대소)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김정일은 즉석에서 당조직부에 누가 소련 군사대표단의 현황을 주석부에 발설했는지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날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국장을 해임시키고, 김일성의 군사고문인 김두남까지도 6개월 동안 혁명화를 보냈다.
 
그렇듯 아들이 연출하는 신격화의 주인공으로만 살아야 했던 김일성은 말년에는 거의 강요의 삶으로 전락하게 된다. 김일성이 사망 전 날인 1994년 7월 6일에야 전국적으로 식량 배급이 중단된 사실을 처음 알았을 정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석이 아니라 주석궁의 주인일 뿐이었다.   
 
당 조직지도부가 오늘날 장성택을 일거에 처형숙청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의 당 총비서 권력을 상징적인 지위로 부풀려 놓고 그 안에서 김정일의 실제적인 당 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를 구축했던 조직 장악력의 경험과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 조직지도부 군 담당 13과 앞에서는 최룡해도 한갓 평당원에 불과하다. 장성택이 그런 당 조직지도부를 상대로 새로운 힘을 키우기엔 너무 시간이 짧았다. 김정일이 장기간 통치했던 시간만큼이나 당 조직지도부의 권력과 인맥은 강했던 것이다. 
 
또 그런 당 조직지도부가 군림하고 있어서 국가운영에서 필수인 정치국 확대회의나 당대회 같은 합법적 체계와 절차가 무시된 김정일의 일인지배 통치가 가능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북한은 김정은이 아니라 당 조직지도부의 신념인 김정일의 유훈통치로 지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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