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에선 수많은 인민들이 굶어주고 가고 있는 데 다른 편에선 김정일이 ‘강성대국’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 모순된 북한사회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본지는 이론과 실제에서 우리나라 최고 북한전문가의 한 사람인 강인덕 전 통일부장관의 눈을 통해 현재의 북한상황, 김정일수령 독재 체제의 구체적 속성과 3대세습의 성공 가능성 등을 짚어 보려한다. 이 글은 2주에 한번씩 연재할 예정이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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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공산주의, 공산당, 사회주의국가, 사회주의 정권 등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이 휴전체제로 들어간 지 1년 정도다. 지난 1945년 여름이었다. 당시만 해도 휴전선의 전운이 가시지 않았던 시기 인지라 우리나라 대학생 중 공산주의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겠다는 자는 거의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일성 일당의 무력남침으로 300만의 무고한 국민과 국군 그리고 유엔 참전용사들이 희생되고, 전국토가 폐허로 변한 판인데 굳이 그들의 실체를 따져 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연히 불온문서를 보다가 ‘빨갱이’로 오해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시기에 나에게 요샛말로 아르바이트 일감으로 “불온문서들을 정리하는 일을 하지 않겠는가?”라는 제안이 왔다. 그 제안자는 바로 치안국에서 대공사찰을 담당하고 있는 현직 경찰관이었다. 필자는 그에게 “왜 내게 그런 요청을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자네가 KBS와 국군방송에서 하는 북한 청소년들에게 보내는 방송을 들었다. 자네라면 불온문서 정리를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육군 심리전 담당 선배로부터 “자네가 북한 젊은이들, 특히 북한 학생들에게 보내는 프로에 출연해보면 어떤가?”라는 권고가 있어 몇 번 방송에 나간 일이 있었는데, 그 방송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등록금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나에게는 ‘웬 떡이냐’하고 즉석에서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그 길로 을지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던 내무부청사(지금의 외환은행본점)로 가 안내를 받아 어두컴컴한 창고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움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상상 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불온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창고 안에 간이침대를 놓고 불온문서 정리를 시작했다.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김일성 등의 원전책자, 각국 공산당의 결의문서, 강령규약 그리고 남한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이 만든 필사본 문건 등 각양각색의 문서들을 6~7개월간에 걸쳐 구분, 정리했다.

그런 가운데 기왕 공산주의 문건과 접하게 되었으니 내친김에 본격적으로 공부해보자는 의욕이 생겨 관계자에게 내 뜻을 말했더니 그 자리에서 흔쾌히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후일 우리나라 북한 연구의 원로로 추앙받는 여러 선생님을 소개해주었고 필요한 등록금도 대주었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공산주의 공부는 대학졸업 후에도 계속되었고, 군(해병대사령부)에서의 공산주의 군사전략연구, 5.16 군사혁명 이후 중앙정보부에서의 중국-소련-북한 관계 정보분석과장, 국장 그리고 70년대 남북대화가 시작되던 때는 남북대화사무국장을 맡아 평양을 다녀오면서 심화되었다.

1978년 관직을 떠나 민간 연구소와 대학에서 강의를 맡으면서 필자는 후대들에게 북한 지배집단을 비롯한 공산국가의 집권자들이 내건 이른바 ‘투쟁강령’이나 슬로건의 본질과 그 실제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전략전술뿐만 아니라 그 나라 국민의 전반적인 사회생활을 깊이 요해(了解)하여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켜봐야 한다는 말을 강조해왔다. 그들이 내건 이론이나 슬로건은 너무나 현실과 떨어진 허구성이 심하니 반드시 실제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 흔히 말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강조해왔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 레닌 등이 제시했던 ‘각 개인의 필요에 의해 모든 물자를 분배받는 공산주의 사회건설’이니 60년 전 김일성이 제시했던 ‘모든 인민이 고깃국에 밥, 기와집과 비단옷을 입는 자립적 민족경제건설’이니 또는 ‘남조선혁명과 3대 혁명역량건설’ 또는 오늘날 김정일이 제시한 ‘선군정치와 강성대국건설’ 등등이 얼마나 현실과 동 떨어진 주장들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회 내부, 인민대중의 사고(思考)와 인식. 특히 공산국가의 사회문화 현상을 명백히 파악해야 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식량부족으로 수십만의 인민 특히 어린이, 노약자들을 굶어 죽이면서 (황장엽씨는 300만이 굶어 죽었다고 증언) 무슨 ‘강성대국’을 건설한다는 말인가?

인민대중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는 김정일이 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식량부족을 외면하는가?

지금부터 30년전 1983년 6월. 후계지위를 확보한 김정일은 북한의 최고 간부들-연현묵(당시 당정치국원, 부총리), 오진우(인민무력부장, 당정치국상무위원) 등을 대동하고 비공식 중국 방문길에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하여 인민공사(人民公社)를 해체하며, 농업부문 개혁을 끝내고 ‘계획경제를 주로 하여 시장 조절을 종(從)으로 하는 공업부문, 유통부문 개혁으로 전환’하려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왜 우리처럼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하지 않고 수정주의로 나가는가?’라고 비난하여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분노를 산 바 있는데, 그 후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의 대중국관은 변했는가? 지난 1년 동안 세 번씩이나 중국을 방문하고 ‘천지개벽한 중국의 경제를 높이 평가하며 중국 공산당이 이룩한 놀라운 발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김정일은 중국처럼 개혁개방을 하려하지 않는가? 중국공산당 노선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는데 왜 자신은 개혁개방으로 전환할 생각을 하지 않는가? 최소한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필요한 식량을 수입하여 배급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가?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시기 옥수수의 국제가격은 톤당 100~150 달러 내외였다. 각국에서 지원해준 식량으로 모자라는 양(量)을 수입하자면 100만 톤 정도면 족했을 것인데, 그 값은 1억 달러 내지 1억 5천만 달러였다.

과연 이런 돈이 김정일에게 없었는가? 옥수수 100만 톤 정도 수입할 외화는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왜 수십만의 무고한 인민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면서 외면했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자신의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억압수단, 핵개발, 추종자들의 충성심을 고양시키기 위한 선물 등을 사오는 것이 옥수수 100만 톤 사오는 것보다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 수중에 있는 외화사용 대신 북한 인민들이 보다 쉽게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체제개혁과 대외개방을 단행하면 될 것인데 왜 이를 주저하며 거부하는가? 이미 중국에서 ‘경제체제개혁 없이 경제성장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고 오지 않았는가? 이미 ‘중앙집권적 계획 경제 체제’로는 인간의 창의력을 발동시킬 수 없으며 경제의 어느 한 부분이 계획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모든 경제가 제 기능을 발동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경제체제개혁을 거부하는가? 이른바 ‘자력갱생의 민족자립경제건설’은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과학기술 그리고 인구와 영토의 크기로 보아 불가능하다는 사실, 특히 전 세계적 규모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어 사회주의 시장 자체가 없어진 마당인데, 무슨 방법으로 글로벌 경제를 외면하고 폐쇄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김정일 일당이 체제개혁과 대외개방을 거부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외부정보가 유입되어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 독재체제, 세습체제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 인민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류는 김일성 김정일의 독재와 김씨 일가의 세습체제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북한체제의 본질, 북한사회의 실제를 분명히 알고 그들과 대해야한다. 공산주의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몰고 온 후과(後果)는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로 입증되었은즉 북한의 체제붕괴도 역사의 귀결임을 예단하지 않을 수 없다.

강인덕 본사 고문<전 통일부 장관, 현 일본 성학원대학 종합연구소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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