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이 식량 분배과정에 대한 감시까지 허락하며 미국에 쌀 지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면 남북대화 요청도 그 일환에서 서두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각에선 북한 정권의 예외적인 그 반응을 두고 대량아사 설을 주장하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300만 대량아사와 같은 집단참극은 북한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수령의 주체가 낳은 비극일 뿐, 오늘날의 북한은 시장논리대로 움직이는 주민 주체의 나라이다. 쌀이 없어서 배급을 못 주고, 배급을 못 주기 때문에 주민통제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주민이 아니라 사실 정권이 더 초조하다고 봐야 정답이다.
 
그 초조함은 엄연히 정권불안에서 비롯되는 절박함이다. 그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김정일이 자인할 수밖에 없었던 증거가 바로 7.1조치이다. 300만 대량아사 이후 최초로 시장이란 생존공간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 정권은 방임적 시장이 어느새 통제 불능의 시장으로 급격히 확대되자 뒤늦게 법적 구속력을 만들기 위해 시장의 부분적 현실을 인정하는 7.1조치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7.1조치 이전에는 국가공시 쌀 가격이 1kg에 4전이고(배급중단 이전 가격) 평균 월급이 백 원 안팎이어서 당시 쌀 1kg에 80원이던 시장가격에 눌려 기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있을 때였다. 때문에 2000년 7.1조치의 핵심은 국가가격의 붕괴를 인정하고 시장가격의 형평성을 고려한 임금평가를 새롭게 실시한 것이었다.
 
북한 정권의 7.1조치 목적은 시장가격을 잠정적으로 인정하되, 그에 상응한 임금평가와 동시에 엄격한 시장규제로 시장에 몰린 화폐를 점차 회수하여 궁극적으로 강력한 통제력을 복원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Kg에 40전이던 과거 배급 쌀값도 40원으로 올리는 것과 동시에 시장에서도 쌀을 그 이상 못 팔게 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에 한하여 한꺼번에 많은 돈을 풀고 배급이 정상화되자 처음엔 시장이 주춤하는 듯했다, 김정일 정권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호응하며 남북화해 명목으로 대북지원을 적극 수용한 것도 시기적으로 바로 이때였다. 당시 국가계획위원회의 연초 식량계획에는 통전부가 남한으로부터 끌어들일 대북식량 적정 수량이 아예 명시돼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남북화해를 지렛대로 북핵 자주권을 주장하는 과정에 대외전략 여파로 식량수급에도 불균형적 차질이 빚어지자, 곧바로 정권의 배급능력 한계로 드러났고, 이는 즉시 시장 쌀 값 상승으로 이어졌다. 쌀값보다 더 큰 문제는 북한 내 많은 기관인력이 더는 정권의 배급제를 신뢰하지 않고 시장인력으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기관충성이 아니라 시장충성 주민으로 돼 버린 셈이었다. 심지어는 배급을 정상화하는 군이나 당과 같은 권력기관들에서까지도 이탈현상이 심화됐다. 그 이유는 한 달 동안 고달픈 출퇴근의 결과로 질이 안 좋은 배급 쌀을 받느니, 차라리 자유인으로 시장에서 며칠 고생하면 그 돈으로 얼마든지 좋은 쌀을 선택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7.1조치는 물가만 몇 배로 증폭시켰을 뿐, 09년 북한이 화폐교환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원화가치를 크게 추락시키는 결과로 끝나게 됐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한에서 쌀은 이제 더는 주민식량이 아닌 김정일의 통치식량이 돼 버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북한에서의 쌀이란 배급제를 복원하려는 정권과 배급제를 거부하는 주민들 사이의 상징적인 가격경쟁 대상이 됐다.
 
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대량아사 연장선에서 북한을 본다면 크게 오판하는 것이다. 그 말인즉 이젠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 관점도 달라져야 할 때이며 또 비로소 그 시기가 왔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북지원은 북한의 시장화와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방향에서 추진해야 한다. 지난 노무현 정부시기 대북식량지원이 증가되자 김정일이 시장을 폐쇄하고 배급제 복원을 시도했던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탈북시인 장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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