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심화조(深化組)사건은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의 권력공고화 과정에서 빚어진 대규모 숙청작업으로, 1997년 8월 전 조선노동당 당중앙위원회 농업담당 비서 서관희가 6.25 전쟁 당시 미국 간첩으로 전향됐다는 혐의로 공개 처형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사회 안전성(보안부)은 전국 수백 개 하부조직에 8,000여명의 인원을 망라한 ‘심화조’라는 조직을 만들고 간첩망을 조작해 내며 반대파들을 숙청했다.
 
심화조의 지휘자는 김정일 매제인 장성택(전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서 고문과 심문으로 2000년 말까지 숙청한 고위간부들과 가족은 무려 2만5,0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심화조’는 체포된 사람들에게 악착한 고문을 감행해 문성술(당시 노동당중앙위원회 본부당 책임비서)과 전 증산군 군당 책임비서는 취조과정에 맞아 죽었고 서윤석(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평안남도 도당 책임비서) 사람들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정도가 되었다.
 
또 서관히(당중앙위원회 농업담당비서), 박승일(남포시 당 책임비서), 평안남도 숙천군 관리위원장 등은 공개처형됐고 그의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김정일의 꾸며낸 모략과 속임수는 오히려 주민들에게 증오와 환멸을 가져다주었고 간부들 속에서 조차 반항의 기색이 역력해 공포와 분노가 엇갈렸다.
 
더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기울어지자 김정일은 또 다시 인민들을 기만할 새로운 모략이 필요했고 방법은 단 하나, 김정일의 비호 밑에 지금까지 온갖 악행을 저지른 ‘심화조’ 사건을 뒤집어엎는 것이였다. 
 
독재자 김정일은 자기를 위해 수십 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철저한 심복이며 ‘심화조’의 거두인 최문덕(당시 사회 안전부정치부장)과 일부 '심화조'성원들을 하루아침에 칼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양강도 대홍단군 보안서 주민등록과장 도용택(63살, 중좌)도 심화조의 일원으로 나섰다가 김정일의 희생물로 2007년 8월 17일, 교화 소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당시 도용택은 10년형을 받고 회령시 전거리 교화 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교화소장이 교화 국에 회의를 갔다 와서 담당보안원에게 “도용택을 빨리 죽여 사건 내막을 막으라, 이제부터 면회를 금지시키고 말려 죽여라”고 지시했다. 그때부터 도용택은 ‘낙후자’라는 명찰을 달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똥통'을 메고 일하기 시작했다.
 
몸이 허약하고 간염에 걸려 배가 불었지만 계속 일을 시켜 결국 반년도 못되어 죽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김정일이 늘 입버릇처럼 부르짖는 ‘광폭정치’, ‘인덕정치’이다.
 
이 사건 이후 북한주민들은 김정일의 잔혹성에 다시 한 번 몸서리쳤으며 하루빨리 김정일 독재정권이 붕괴되기를 소원하게 되었다.
 
역사는 독재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김정일은 반드시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나 이라크의 후세인과 같이 국민을 외면한 독재자들의 비참한 말로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신철호 기자 rlwk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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