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부의 응석은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다. 우리 일본의 지난 20세기 역사에 대한 이해는 이와 같다. 너희들의 역사적 정체성은 무엇이냐. 과연 우리와 같이 자유, 민주주의, 인권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인가.’

● 역사의 해석을 두고 다투는 외교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역사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당대인들의 가열한 선택이다.  
 

지난 8월14일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발표한 ‘전후(戰後) 70년 담화’는 한국 정부와 한국인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누구인가.”

아베 담화를 몇 차례 정독한 나머지, 나는 그 같은 질문에 봉착했다. 아베 담화는 형식상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 2005년의 고이즈미 담화를 계승하고 있다. 단어의 구사에서나 문장의 흐름에서 이전 담화를 저본(底本)으로 삼고 있다. 그렇지만 세 배나 길어진 담화의 곳곳에서 이전 담화의 중요 부분을 취소했다.

아베 담화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회고로 시작한다. 서양은 압도적 기술력과 군사력으로 전 세계를 식민지로 분할했다. 식민지화의 위기감에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입헌정치를 세우고 독립을 보존함에 성공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인민에게 용기를 줬다. 이렇게 아베 담화는 일본의 한국 병합을 역사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정당화하고 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미국은 일본이 필리핀에 공격적 행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권리를 양해했다. 이렇게 일본의 한국 병합은 제국주의 열강의 공조체제로 이뤄졌다. 아베 담화는 그 점을 상기함으로써 한국 병합에 미국을 위시한 열국의 책임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아베 담화가 시인하는 일본의 잘못은 1930년대부터의 사변, 침략, 전쟁이다.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을 말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의 창설을 통해 전쟁을 범죄시하는 새로운 국제 조류가 나타났다. 일본은 그러한 국제 조류를 거슬러 힘으로 자국(自國)에 유리한 국제질서를 만들려고 했다.

그 점이 잘못이었다. 그런데 일본을 곤경으로 몬 것은 대공황 이후 열강의 블록화 정책이었다. 아베 담화는 그에 대한 지적까지 놓치지 않음으로써 일본의 과오에는 열강의 책임도 있음을 환기하고 있다.

전쟁은 수백만 무고한 사람의 생명과 행복을 파괴했다. 아베 담화는 전장(戰場)에서 산화한 일본의 군인들, 전화에 휘말린 민간인의 희생, 패전 후 귀환자들의 고통, 일본과 적(敵)이 되어 치열하게 싸운 미국, 호주, 구미 제국 군인들, 가혹하게 취급된 전쟁포로의 아픔, 인격과 명예에 굵은 상처가 가해진 여인들에 대해 가슴 끓어오르는 애도를 표한다. 

 

‘연합국의 관대함’에 대한 감사의 인사

담화는 매우 훌륭한 문장이다. 그리고선 일본의 잘못을 용서하고 국제사회로의 복귀를 도와 준 연합국의 관대함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전후(戰後) 70년의 일본은 평화국가로서 무력으로 국제분쟁을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견지해 왔다. 식민지 지배와는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모든 민족이 자결의 권리를 갖는 세계를 지향했다.

그 같은 전후 70년에 긍지를 느낀다. 앞으로도 그 점을 부동의 방침으로 고수하면서 일본은 평화의 국제질서, 여성의 인권보호, 자유로운 국제경제, 개도국(開途國) 지원에 바탕을 둔 세계를 건설해 가는 데 기여해 갈 것이다. 이상이 아베 담화의 요지다.

결과적으로 아베 담화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가 천명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취소한 셈이다. 형식적으로는 이전 정부의 담화를 계승한다고 했지만, 내용으로는 이전 담화를 기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 정부 외무성 홈페이지는 아시아 역사문제 관한 기존의 입장을 내리고 총리의 담화에 기초한 개정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고시했다. 아베는 1910년의 한국 병합은 일본이 사과할 문제가 아님을 명확히 했다.

아베 담화의 마지막 문장은 나의 머리를 둔기로 치는 것 같았다. 일본은 자유, 민주주의, 인권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와 손을 잡고 평화와 번영의 세계를 건설해 가겠다는 대목이다. 얼마 전 일본 정부는 한국을 자유, 민주주의, 인권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의 명단에서 제외했다.

‘한국 정부의 응석은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다. 우리 일본의 지난 20세기 역사에 대한 이해는 이와 같다. 너희들의 역사적 정체성은 무엇이냐. 과연 우리와 같이 자유, 민주주의, 인권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인가.’

한국인의 폐부를 찌르는, 굵은 신음을 토하게 하는 진정면의 질문이다.

아베 담화 바로 다음 날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 70년 연설이 있었다. 거기서 대통령이 아베 담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한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담화문을 정확히 읽고, 이전 담화와의 연속과 단절을 이해하고, 전문가 의견을 청취하고, 새로운 담화에 담긴 복층의 시사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적어도 며칠이 소요된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루 만에 감정적이고도 부정확한 코멘트를 발했다. 아베 담화를 가리켜 “살아 있는 증인이 있는데 역사를 가린다”고 비판한 것은 일국(一國)의 원수가 입에 담기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수사였다. 아쉽긴 하지만 역대 총리의 담화를 계승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취지의 발언은 오독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 : 몽환의 당혹감

나는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 아베 담화를 얼마나 진지하게 읽었는지, 그 복잡하게 흐르는 문맥 가운데 한국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를 올바로 찾았는지, 그럴 만한 지력(知力)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반복해서 읽은 나의 소감은 한마디로 몽환의 당혹감이다. 대통령의 연설은 꿈속을 헤매듯이 지난 70년의 한국사를 회고했다. 대통령은 “70년 전 오늘, 우리 민족은 독립을 향한 열망과 헌신적인 투쟁으로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이루어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오랜 세월 해마다 되풀이되어 온 이 같은 광복절 치사는 유감스럽게도 사실이 아니다. 나는 역사학도로서 그 점을 솔직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제국의 패망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성립도 국제적 협의 과정에 의했다.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린 미국은 1941년 8월 대서양선언을 통해 전쟁이 끝난 뒤 후진 민족이 강탈된 주권과 자치를 회복하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구상을 밝혔다.

1942년에는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시킨다는 방침을 정하고, 이를 1943년 12월의 카이로 선언에서 천명했다. 이 같은 미국의 선택은 필리핀의 독립 방침과 밀접한 연관을 이뤘다. 다시 말해 미국의 한국 방침은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을 영유한다는 1905년에 이뤄진 양국의 밀약을 파기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 같은 미국의 전후(戰後) 처리 방침에 한국인들이 유효한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그 전후 처리를 위해 미국의 젊은이 10만 명이 태평양에서 죽었다. 300만의 일본인이 그의 제국을 지키다가 죽었다.

일본의 영토로 지배된 한국에서는 23만 명의 젊은이들이 군인과 군속으로 징발되어 그 중 2만 2000 명이 태평양에서 일본인과 함께 죽었다. 그런 이유에서 1951년 48개 연합국과 일본의 강화조약에서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카이로 선언은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모스크바 회담, 미소(美蘇)공동위원회,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이라는 국제적 협의 과정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48년 한반도 남부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이후에도 국제사회는 이 신생국의 주권에 시비를 걸었는데, 그 마지막 국제적 협의가 1954년의 제네바 회담이다.

한국의 외교관들이 그 회담에 나가 대한민국을 취소하자는 중국, 북한, 인도 등의 공세를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 3년간의 전쟁에서 미국의 젊은이 3만 6,574명이 이 땅에서 죽은 덕분이었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대한민국은 제국주의 체제를 대신한 미국의 전후 처리 방침과 그 실천 과정에서 태어난 나라다.

내가 대통령의 연설이 꿈속을 헤매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이 나라의 성립을 둘러싼 이 같은 국제정치의 역사에 대해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웅장한 군세를 이뤄 두만강을 넘어 일본군을 몰아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북한의 김씨 왕조가 역사를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솔직히 지적해 우리 대통령의 연설에 나타난 역사 인식이나 김 씨 왕조의 위선적인 역사 서술은 그 거리가 멀지 않다.

대통령은 마땅히 이 나라를 독립시키고 방어해 준 미국에 대해 한국인을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했다. 아베 총리가 일본의 잘못을 용서한 연합국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 것 이상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읽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냉소와 경멸의 눈초리로 한반도를 응시할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마음을 다해 감사할 수 있을 때, 역사의 원망은 은혜로 바뀐다. 일본과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미국의 백악관이 아베 담화를 긍정한 것을 보라. 명확히 미국의 책임을 지적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웃음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요 미덕이다.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은 대한민국을 성립시킨 해방 후 3년간의 국내 정치에 대해서 심한 혼란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은 오늘은 ‘조국의 광복’을 이룬 70년이자 ‘건국’ 또는 ‘정부수립’을 이룬 67년이라 했다. 광복은 무엇이고, 건국은 무엇인가. 나는 본지 505호에 게재한 글에서 광복과 건국은 실은 동어 반복임을 지적했다. 한 나라가 그의 최대 국경일을 기념하면서 이런 식의 혼란을 드러냄은 더 없이 부끄러운 일이다.

70년 전의 그 날은 미국에 의해 이뤄진 해방의 날이다. 이후 3년간 한국인들은 어떤 국가를 세울지를 두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다.

“자유민주주의로 나라를 세워야 한다. 공산주의로 가는 것은, 그럴 위험이 큰 좌우합작은 이 민족을 다시 한 번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과 같다.”

그러한 외침으로 반공의 보루를 구축하고 다중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바로 잡아 결국 이 나라를 세운 사람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그의 혜안과 투지가 없었다면 아마 대한민국은 그 고고의 성을 울리지 못했을 것이다.

후대의 대통령은 67년 전의 건국 사건을 회고하면서 초대 대통령의 아름다운 공적을 기렸어야 했다. 그 역시 국민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첩경이다.

대통령이 이 나라가 지난 세대에 이룩한 경제적 성취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칭송한 것도 적절치 않다. 저(低)성장 추세가 이미 10년을 넘겨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자연이나 역사에 있어서 기적은 없다. 경제성장의 기초적 조건이라 할 시장경제제도는 일정기(日政期)에 걸쳐 정비되었다.

해방 후 분단과 전쟁으로 산산조각이 난 경제를 일으킨 것은 미국의 원조였다. 1967년까지 군사원조를 포함하여 근 100억 달러의 원조가 공여되었다. 그를 통해 식량, 비료, 정유, 면방직 등의 기초공업이 1960년대 전반까지 건설되었다. 1950년대에는 국민교육 열풍이 불었다.

1965년 반일(反日) 민족감정의 큰 장벽을 넘고 일본과 국교정상화가 이뤄졌다. 이후 한국, 미국, 일본을 연결한 소재, 부품, 시장의 국제적 연관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지지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후진경제가 조만간 봉착하기 마련인 기술개발의 애로를 한국경제가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손쉽게 고급 소재, 부품, 기계를 수입할 수 있는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웃 효과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한국경제가 누리는 매년 300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는 매년 200억 달러에 달하는 대일(對日) 적자에 기초한 것이다.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개도국의 교과서로 찬양하기 전에, 그것을 가능케 한 내외의 조건과 역사에 대해 겸허하게 감사의 뜻을 표해야 했다.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100년 전의 조선왕조는 무엇인가. 중화(中華)제국의 번병(藩屛)으로 존재했던 그 나라가 무리하게 외세를 끌어들여 사직을 보존하려고 했을 때, 동아시아의 역사는 얼마나 불행해졌는가. 그에 대한 한국인의 책임은 없는가.

한국인의 책임은 없는가?

인간은 누구나 제 나름의 개성적 기억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이 서로 독립적인 것은 서로 다른 기억과 해석을 존중해서다. 격동의 역사에 대한 나라마다의 기억은 각각의 처지가 달랐기 때문에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부드러운 얼굴로 각자의 기억을 존중하는 가운데 시선을 함께 미래로 맞춰야 한다.

역사의 해석을 두고 다투는 외교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그것은 어떤 상징으로써만 통합이 가능한 부족사회에 고유한 일이다. 자유와 독립의 인간에게 역사는 인간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용기와 비겁을 배우는 성찰로 있을 뿐이다. 아베 담화의 한 구절을 빌리면 역사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당대인들의 가열한 선택이었다.

한국은 아직 부족사회인가, 아니면 자유, 민주주의, 인권의 기본적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인가. 아베 담화가 던지는 물음에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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