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명 칼럼] 헤모필리아라이프는 곧 출범할 미디어그룹 내일의 핵심 매체다. 희귀질환인 혈우병 전문 매체로서 톡톡히 그 역할을 해왔지만 한 단계 더 끌어올려 환자중심 혈우사회의 확립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매체로 거듭나리라 기대하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 혈우병 신약 도입과 관련해 과거를 짚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를 되짚고 현실을 비판하여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혈우사회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사례와 비합리적 관행을 고치는 개혁에도 나설 것이다. 모든 결정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는 환자들의 주권과 인권을 위해 의료계와 산업계, 의료계를 적극 감시할 것이다.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이 칼럼은 일종의 선언과 같다.

“혈우병환자 가운데 39명이 집단으로 급성 A형 간염에 감염됐다”

지난 1999년 9월 20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이성재(국민회의) 의원은 정기국회에서 혈우병 감염사건을 폭로해 세간을 깜짝 놀라게 한다. 특정 치료제를 사용했던 혈우병 환자들이 집단으로 간염에 걸렸다는 충격적인 발표였다. 발병 시점은 약 1년 전 10월로 보건당국이 이듬해 3월 역학조사에 나섰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폭로가 나오기까지는 1년여의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당시 이 의원은 한국혈우재단에서 조사한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혈우병 환자들의 50%가 이미 C형 간염의 보균자인 상태에서 다시 A형 간염에 노출됐을 때 치명적인 결과가 예상되는 시급한 문제인데도 보건당국이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해 1년이 다 되도록 역학조사결과 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며 정부당국을 강하게 질타했다.

이 발표 후 그동안 혈우병 환자 문제에 냉담했던 언론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 의원의 주장은 그때서야 빠르게 여론으로 전파됐다. 역학조사 결과에 따라 대체의약품을 선정하거나 기존에 사용돼 온 약품에 대한 조처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과, 혈액제제를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혈우병 환자들의 입장에선 안전성에 위험이 있는 약품이 혹시 공급되지 않을까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들이 확산됐다.

그런 와중에 “한국혈우재단에 등록된 혈우병 환자는 1천3백여 명으로 혈우병 치료제는 국내의 경우 한 유명 제약회사에서 독점 제조, 공급하고 있다.”는 핵심적 내용이 이슈화될 수밖에 없었다. 혈우병 치료제를 독점 공급하고 있는 녹십자를 정조준 한 언론의 보도도 빠르게 확산됐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녹십자 오랜 독점공급에 젖어온 이들을 깨운 사건

당시 녹십자의 혈우병치료제는 ‘옥타비’에서 ‘그린에이트’로 이어지면서 이와 경쟁할 타사의 혈우병치료제는 전무했다. 이 약품은 오랫동안 혈우병환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급되어 왔고 환자들은 큰 굴곡 없이 이 제품을 써왔다. 아니, 다른 치료제가 없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이 의원이 ‘혈우병 치료제의 감염사태’ 폭로 이후 논란이 확산되면서 그때서야 ‘대체약품’ 이야기가 불거지면서 급물살을 탔다.

‘대체약품’으로 지목된 치료제는 바로 한독약품에서 준비하고 있던 ‘모노클레이트-P(센티온사)’라는 치료제였다. 몇몇 의료 전문가들 입에서는 녹십자의 기존 치료제보다 한독약품이 수입하려는 이 치료제가 효과가 향상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급기야 한국혈우재단까지 나서서 한독약품의 치료제가 국내 환자들에게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혈우병치료제와 관련해 누구도 말하지 않던 것을 들추어 꺼낸 이 의원의 폭로는 의미가 깊었다. 식약청은 국립보건원으로부터 녹십자의 혈우병 치료제(혈액응고인자)에 “일부 문제가 있다”는 역학조사 결과 보고서를 받았고, 문제의 치료제와 같은 제조번호를 갖고 있는 제품에 대해 “봉함. 봉인 조치”를 내렸다. 식약청은 또 전국 의료기관에 문제 제품의 사용을 전면 중단할 것을 지시하는 등 꽤 수위 높은 조치를 단행했다.

이 의원의 폭로 이후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환자단체는 치료제의 ‘감염사태’라는 초유의 이슈로 거친 민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고, 그 같은 노력 끝에 보건당국은 ‘대체약품’의 필요성에 무게중심을 옮겨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이 문제는 혈우병 치료제 공급을 독점해오던 녹십자와 식약청 간의 소송 전으로 번졌다. 녹십자 입장에서는 만약 ‘치료제에 의한 감염’이라고 결론이라도 나게 된다면 녹십자의 아성은 그대로 무너지고 독점지위에 있던 혈우병치료제 시장을 온전하게 경쟁사인 한독약품으로 빼앗길 판이었기 때문이다.

경쟁자의 등장, 양분된 혈우병 사회 그리고 법정다툼

발등에 불이 떨어진 녹십자는 당연하게도 적극적인 방어와 반박에 나섰다. 녹십자는 “문제가 된 제품 전량을 고려대 연구팀과 일본의 공인 임상시험기관인 SRL에 의뢰해 두 차례 실험을 거친 결과 모든 제품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당사자가 공동으로 참여한 전문기관에서의 공개실험을 실시하자”고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지방의 몇몇 환자모임에서도 ‘말도 안 되는 조치’라며 ‘A형 간염’은 인체에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해당 치료제에서 감염됐다는 것 또한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고 반박하면서 환자들도 양분됐다. 치료제를 사용하던 이들의 의견이 조금씩 엇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보건당국은 감염 폭로 이후 ‘대체약품’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건당국의 이 같은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어준선(자민련) 의원은 1999년 10월 4일 대한적십자사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혈우병환자들의 A형 간염의 감염 사태로 인해 보건복지부 등 당국이 대체약품으로 미국 센티온사의 혈우병치료제 수입절차를 밟고 있으나 이 회사 제품은 광우병 문제로 미국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제품”이라고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어 의원은 “센티온사의 혈우병치료제는 광우병 인자가 포함돼 있어 미 식품의약국(FDA)이 지난 96년 이후 리콜한 사례가 수십 건에 달한다”며 정부의 수입추진에 재동을 걸었다. 이후 국회에선 다시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고, 녹십자와 보건당국과의 법정다툼도 더욱 치열해져갔다.

법정으로 간 이 소송은 1심과 2심이 엇갈리면서 혼란은 더욱 커졌다. 더욱이 환자들도 입장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수도권과 중부권 등지의 환자들은 ‘대체약품’을 주장하며 “녹십자의 치료제는 ‘감염’ 치료제”라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고, 호남과 광주를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는 “광우병에 노출된 치료제가 대체약품인가”라며 이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본질은 ‘혈우병 치료제 시장 쟁탈전’ 이것이 시사하는 것

이런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지켜보며 혈우사회 전문가들은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국회와 환자들의 의견갈등은 표면에 불과할 뿐 내막을 들춰보면 녹십자와 한독약품의 치열한 ‘혈우병 치료제 시장 쟁탈전’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치열했던 과정을 지나 녹십자는 ‘그린모노’라는 단일클론항체의 제품으로 업그레이드 된 제품을 출시했고 한독약품의 ‘모노클레이트P’도 국내에 런칭됐다.

시장규모는 약 9대1정도로 녹십자의 제품이 여전히 월등하게 우세했지만 녹십자 이외의 타사 경쟁 치료제가 국내 혈우사회에 진입하게 된 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녹십자의 향상된 치료제 ‘그린모노’는 다국적기업인 박스터의 ‘기술제휴’ 제품이었다는 점이다. 박스터는 이를 계기로 국내 환자들에게 인지도를 높여가게 됐고 여전히 시장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국내 기업인 녹십자에서 다국적기업의 제품이 독점지위를 누리고 시장을 휩쓸고 있다는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만 느껴진다.

혈우병 사회에서의 약품 감염 이슈는 공교롭게도 경쟁사의 등장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 왔다. 약품의 질이라는 이슈가 발생하면 환자들 뿐 아니라 보건당국도 액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999년에 발생한 혈우병 감염사건도 심각한 문제로 끝맺게 되었다면, 어쩌면 지금은 녹십자가 혈우병 치료제 제품 공급을 중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집단적인 A형 간염 발생’이란 감염사례는 결국 ‘실험실에서의 환경 문제’라는 결론으로 끝이 나면서 녹십자로서는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혈우병 사회에 충격을 던져줬던 당시 사건은 일종의 전환기였다.

녹십자의 제품 독점 공급이 오래되면서 알게 모르게 벌어진 틈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줬고, 그 틈 사이로 ‘박스터’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하면서 경쟁이라는 가치의 중요성, 그리고 그 경쟁의 수혜자는 오롯이 혈우병 환자들이 될 것이라는, 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본질을 우리에게 새삼 알려준 것이다.

박한명 미디어내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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