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경북 영천시 고경면 대성리 출생 ▷영천초교 졸업 ▷영천 영동중 졸업 ▷대구고 졸업 ▷경찰대 2기 졸업 ▷영천경찰서장 ▷경찰청 뉴욕주재관 ▷청와대 치안비서관 ▷경북경찰청장, 경기경찰청장 ▷행정자치부 소청심사위원회 상임위원

[김태일 기자] 행정자치부 소청심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근무중인 이만희(51)위원은 뼛속부터 공직자다.

이만희위원은 경북 영천에서 순경의 아들로 태어나 경찰대를 졸업한 뒤 경찰 총수의 문턱까지 탄탄대로를 걸었다. 고향의 경찰서장을 비롯해 경찰청 폭력계장, 강력계장, 경북경찰청장, 경찰청 뉴욕주재관, 청와대 치안비서관, 경기경찰청장 등 경찰로서 할 수 있는 대다수 자리를 두루 경험했다.

경위부터 경정까지 시험만으로 순탄하게 올랐다. 수사 간부 지휘능력을 배우는 수사간부연수소 6개월 과정과 전국에서 수백 명이 응시한 경정 승진시험을 모두 1위로 통과하는 등 엘리트 경찰의 표본이 된 인물이다.

영천 사람들은 수사통인 이 위원이 경찰 총수까지 오르지 못한 데 대해 못내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다양한 기회를 준 국가에 대해 크게 감사하고 있다. 이만희 위원은 “28년 동안 수사, 정보, 기획 분야를 망라했고 청와대 근무와 해외주재관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능력껏 다했고, 결과도 좋았다”며 “이 같은 기회를 준 경찰조직과 국가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말죽거리 소년, 나랏일을 꿈꾸다>

이 위원은 할아버지가 영천시 고경면 대성리에서 꽤 많은 논밭을 일구며 터를 잡은 덕분에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2남 1녀 중 장남인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순경인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아버지가 영천시내 역전파출소 등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영천시 완산3동 전통시장 인근 말죽거리에서 성장했다. 말죽거리 소년은 일찍이 웅변대회에 나가 많은 상을 받고 고전읽기를 통해 다양한 책을 접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 웅변을 많이 하고, 방학에도 학교에 나가 고전읽기를 한 것이 커서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물론 순경인 아버지로부터 공직자, 나랏일에 대한 막연한 선망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대구의 고교에 입학한 뒤 절반은 중앙선 열차를 타고 통학을, 절반은 동구 신암동에서 누나와 함께 자취를 하며 ‘나랏일 하는 사람’에 대한 원대한 꿈을 키웠다.

<영천의 아들, 경찰 엘리트로>

고교 3년 때 그는 경찰대 1기생들이 학교로 찾아와 경찰대 홍보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바로 여기다’라고 진로를 결정했다. 같은 학교에서 40여 명이 응시했지만, 이 위원을 포함해 단 2명만 입학했다.

이 위원은 경찰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경감 승진까지 1차례도 미끄러진 적이 없을 정도로 출장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총경, 경무관, 치안감까지 거침이 없었다. 여기에 순경인 아버지의 배경이 작용할 리 없었다. 공직자의 길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만이 뒷받침됐다.

그는 28년 동안 출`퇴근부터 경찰업무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수사간부연수소 6개월 연수과정, 경정 승진시험 등을 1위로 통과하는 등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경찰청 폭력계장과 강력계장을 거친 이 위원은 경북경찰청 방범과장에 이어 2003년 초 고향인 영천경찰서장으로 발령받았다.

“참 행복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수 있고, 고향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약 1년 동안 큰 사건`사고도 없었고, 운도 좋았습니다.”

<신창원, 촛불, 용산사태, 그리고 쌍용차>

이 위원은 경찰 복무 중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신창원 탈주사건’ ‘촛불시위와 용산참사’ ‘쌍용차 사태’ 등을 꼽았다. “신창원 사건을 통해 치안은 경찰 단독으로 보다는 주변 관련인과 시민이 함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결국 국민과의 소통과 공감이 이뤄질 때 안정적 치안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경찰청 폭력계장 4년 동안 절반 이상인 870일 가량을 신창원 검거에 매달렸다. 전 국민적 관심사인데다 전국 경찰조직이 나선 상황이어서 빨리 붙잡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의 제보가 잇따랐다. 그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 생겨 참 어렵고 힘들었다”며 “담당을 오래하다 보니 온갖 제보가 쏟아지는 가운데 어느 것이 신빙성 있는 제보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MB정부 시절인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도 힘들긴 마찬가지. 서울경찰청 형사과장이던 그는 통상 경비과와 수사과가 대응해야 할 집회에 염산 투척, 차량파손과 망치 등장 등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면서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산 철거민들이 화재로 많이 숨진 사건과 쌍용차 대량 해직으로 인한 시위사건 등도 안타깝고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고 그는 말했다.

<뉴욕주재관과 치안비서관의 보람>

경찰청 뉴욕주재관과 청와대 치안비서관 근무는 이 위원에게 가장 보람 있었던 경험이다. 그는 “경찰은 보통 단속하고, 붙잡고, 조사하는 일이 주된 업무지만, 해외주재관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재외동포와 유학생, 관광객을 도와주는 영사업무가 주였기 때문에 보람이 컸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가슴 아픈 기억도 있다. 주재관으로 있을 당시 펜실베니아주립대 여학생 3명이 방학을 맞아 차량으로 4~5시간 떨어진 뉴욕으로 여행 가다 빙판길에 추락해 숨진 사건이다. 이 위원은 사고현장과 학교, 현지 경찰서를 오가며 상황을 파악하고, 시신을 수습해 한국으로 송환하고, 장례절차를 밟는 등 사고 발생부터 수습까지 전력을 다했다. 그는 “숨진 학생들의 부모가 장례까지 끝낸 뒤 한국에서 미국으로 멸치를 보내왔는데, 안타까움이 되살아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말했다.

2013년 청와대 치안비서관을 지냈던 1년도 잊을 수 없다. 청와대는 정책의 최종적인 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각 부처에서 다 파견을 나와 있기 때문에 해당 부처를 알리고 소통하고 협조해 정책의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정부 정책이 원활하게 순항할 수 있도록 주변 여론을 듣고, 특히 정책이 현장에서 잘 가동되는지, 부작용이 없는지를 파악해 해당부처에 전함으로써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경찰의 역할도 중요했다”고 했다.

이 위원은 치안비서관을 지내면서 ▷경찰 수사권 독립문제 ▷직원 초과근무수당 현실화 ▷경감 근속 승진제도 등을 해결하거나 한 단계 진전시킨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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