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은 권력 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결사체이다. 따라서 정치인들이 치열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일 그 자체는 결코 비난 받을 일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 욕망이 없는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 확인해 봐야한다. 결국 정치는 누가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갖느냐를 놓고 벌이는 힘과 욕망의 대결장이다.
 
하지만 권력 쟁취를 위한 이전투구 속에서도 지향되어야할 가치가 있고, 지켜야 할 규범이 있다. 권력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당한 집행 수단이어야지 개인의 탐욕 충족을 위한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정치인의 권력 추구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권력의 지향이 국민의 궁극적 바람에 기초할 때다.
 
 
주인을 제켜놓고 대리인이 설치는 개헌 논의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력이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열정이 아니라 국민의 희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열정이어야 한다. 책임감과 균형적 판단력 역시 초점은 국민에게 맞추어져야 한다. 하지만 최근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개헌 논의 과정을 보면, 권력의 구조 변경을 이야기하면서 국민 의사가 어떠한지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여야 정당의 대표는 해외와 국내에서 개헌을 주장하며 입을 맞춘다. 심지어 공식적인 국회 연설을 통해 개헌의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며 정치권과 국민을 노골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또 개헌 논의의 배수진을 치며 당의 선출직 최고위원 직책을 스스로 내팽개쳤다가 슬그머니 철회한 한심한 사람도 있다. 모두 권력 쟁취에 대한 탐욕만 넘칠 뿐, 정치인으로서의 책임감과 균형감각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헌법은 불변의 성역은 아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왜, 무엇을 위해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정치인의 권력은 타고난 게 아니다. 국민들의 위임에 의해 생성된다. 국민이 합의하여 수립한 헌정질서에 대해 왜 주인(principle)인 국민은 가만있는데 대리인(agent)인 정치인의 주장만 난무할까? 그렇다면 이런 엇박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도대체 국회의원들이 개헌을 제기하며 표방하는 핵심 내용은 무엇이고 그들의 실질적인 속내는 뭘까. 현행 대통령제를 폐기하고, 대통령은 국민이 뽑아 국방, 외교 등의 국정만 맡기고,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뽑아 나머지 국정 전반을 통할하도록 하자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결국 대통령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니 권력을 분할하자는 것이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의 폐해를 줄여보자는 명분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개헌 논의가 타당한지, 제안되는 방안에서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현 제도의 문제점과 새로운 제도의 전제 조건들이 어떠한지를 진단한 후에야 판단할 수 있다. 현행 대통령제의 대통령은 과연 제왕적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대통령의 권력은 인사권과 정책 집행권이다. 하지만 국무총리 및 장관 등 핵심 요직에 대한 국회의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의 인사권을 상당부분 통제한다. 또 정부예산의 심의권, 법률제정권을 통해 대통령의 정책 지향을 제약하거나 때로 변경, 폐기시키기도 한다. 나아가 국회가 정당들의 정파적 이해에 따라 입법심의에서 손을 내려놓으면 국정은 그대로 마비된다. 이럴 경우 대통령은 국민에게 약속하는 정책을 제 때에 집행할 수가 없다.
 
국회는 올해의 대부분을 일하지 않고 공전(空轉)시켰다. 국회의 입법 중단으로 국정이 표류되어도 국회를 해산할 수 없는 대통령이 무슨 제왕적 대통령인가? 국민들 사이에선 국회 무용론을 넘어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국회의원을 제어할 실효적 방도는 하나도 없다. 국회의원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도 여유롭게 비켜간다. 무능한 국회의원을 해임시키는 국민소환제 조차 없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는 신성한 철칙이다. 따라서 그 권력을 대통령에게 위임할지 국회의원에게 위임할지는 국민이 결정한다. 권력을 위임받을 사람이 권력 분배의 구조와 방향에 대해 주도적으로 나서는 것 자체가 주제넘고 염치없는 일이다. 누가 국가의 권력을 국민을 위해 정의롭게 사용할 지는 국민이 판별해야 한다.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때 얻을 수 있는 장점과 폐해, 그리고 국회에 권력을 분할해 줄 때 나타날 효과와 폐해를 비교형량 하여야 한다.
 
 
제왕적 국회부터 혁신하라
 
권력을 위임받고자 하는 집단은 다른 주체가 권력을 행사할 때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 자신의 집단이 수행할 때의 긍정적 효과를 먼저 입증할 책임이 있다.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얻으면 국회의원들이 요구하지 않아도 권력을 먼저 위임해주자는 논의가 빗발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가 아닐까. 현행 제도의 문제점에 주목하기에 앞서 헌법 개정으로 등장할 새로운 권력 주체의 역량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이유다. 
 
특히 이원집정부제를 통해 국회가 직접 국정을 통할하게 될 때, 그 권력이 정당하고 바람직하게 사용되어 국가를 번영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국민에게 심어 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당문화가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회가 조각권(組閣權)을 갖게 되면 불신임에 의한 내각의 잦은 교체로 국정의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크다.
 
더구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시(國是)마저 긍정하지 않는 세력이 포함되어 있는 국회에게 국정의 통할권이 주어지면, 정당 간, 계파 간 추잡한 거래와 협잡에 의해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권력을 분점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을까? 각종 선거에서도 승리를 위해서는 정강 정책을 살피지 않고 어떠한 야합도 서슴지 않는 몰염치한 정당들의 병폐를 보면, 국가의 막강한 권력의 선점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연대와 연정이 판을 칠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종북 의원이 적지 않으니 종북 장관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는 의미다.
 
현행 대통령제에서 권력집중의 현상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로 인한 폐해가 어느 정도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대통령의 권한 행사는 여러 측면에서 국민의 냉철한 비판과 견제를 집중적으로 받고 있다. 또 그에 합당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권력의 집중이 높을수록 권력의 책임소재는 명확해진다. 따라서 책임을 묻고 시정하기도 용이해진다. 또 북한과 대치하고 상황에서 국정의 분열을 최소화하는 것도 중요한 고려요인이다.
 
반면에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선출하고, 각 정당에서 추천한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이 내각을 구성하고 연정(聯政)에 의해 국정을 운영한다면, 국정 각 분야 간의 유기적인 협력을 유지하기 어렵고, 국정의 표류 시 그 책임 소재조차 불분명해지게 된다. 결국 국정을 장악한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권한은 마음껏 행사하지만, 정책 오류에 대한 책임은 소속 정당이나 국회의원 전체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임행정이 실종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군다나 국회의원이 내각과 국회를 수시로 순환하는 체제 속에서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마저 깨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회는 이미 제왕적 국회다. 지금도 국회의원 가운데는 국정 전반에 간여하면서 국가 정책에 정파적 코드를 심기에 골몰하거나, 입법권과 예산 심의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사익을 취하는 데 열성을 바치는 부적격자가 적지 않다.
 
국회와 국회의원들의 실상이 이러하다면 국민들의 요구가 있기 전에 국회의원들은 앞서 헌법 개정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는 점을 직시하라.
 
권력을 탐하는 자에게 권력을 위임해 줄 수는 없다. 국회의원들은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숱한 특권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국민소환제(recall) 등 국회의원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도 국민에게 돌려 달라. 제왕적 국회, 제왕적 국회의원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국회로 다시 태어난 후에, 그 때 국민들이 헌법 개정을 논의하는 자리에 초대되기를 기다리시라.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kipeceo@gmail.com) 

 

저작권자 © 뉴스파인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