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은 우리 사회에서 오남용이 가장 심한 말 중 하나다. 철도공공성, 방송공공성, 교육공공성, 금융공공성, 의료공공성 등이다. 공공성은 좌파 성향의 언론인, 지식인, 시민운동가들이 단골로 이용하는 명분이자 선동 수단이기도 하다. 철도나 방송의 경우에는 노조가 자신들의 복리를 유지하려는 집단이기주의를 공공성의 이름으로 은폐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전교조나 진보교육감들은 이념적으로 편향된 역사교육을 강행하고, 무상급식 확대, 특목고 폐지와 같은 선심성 정책들을 공공성의 명분으로 밀어붙였다. 최근 의사협회, 약사협회, 간호사 협회가 공동으로 벌인 의료민영화 반대 운동의 명분도 공공성이었다.
 
일부 학자들, 정치인들은 금융 공공성을 이유로 금융규제 확대나 서민금융 지원 확대를 역설하기도 한다. 금융소비자 단체를 포함한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가계부채 감축을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다음의 인용들은 이를 잘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은행들이 수익사업으로 거둔 수익은 소비자에게 일정부분 돌려주는 형태로 금융의 공공성을 되찾아야 한다.”, "금융 소외계층에 대한 금융접근기회 확대에도 유념해야한다.", "금융자율화에 따른 금융기관의 경쟁으로 상업성에만 치중하고 공공성은 등한시2)”, “…은행들은 각자 내부적으로 당기순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기본 룰을 정해 놓고 이를 적극 실현하는 한편 이를 사회에 널리 알릴 필요…”, “…금융의 공공성ㆍ공익성에 대한 요구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
 
이런 주장들이나 사례들의 저변에는 공공성은 사적이익의 추구보다는 공적이익 즉, 공익이 더 좋고, 그렇기에 공적기관, 즉, 정부가 이들 사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공공성의 사전적 정의는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구성원 전체에 공통적으로 관련된 특성이나 상태를 말한다. 
 
흔히 공공성은 공공재 (public goods), 공익 (public or common interest), 공적영역 (public sphere)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공성의 개념은, 대비되는 개념인 사적이익 (private interest) 또는 영리추구(private profit seeking)와는 반대로, 그 주체가 불분명한데다가 매우 추상적이고, 애매한 개념이라서 영미권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고,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국가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한편, 공공성은 실행 주체인 관료나 노조, 또는 관련된 정치인이나 특수 이익단체의 집단이기주의로 쉽게 변질된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공무원과 공공기관의 임직원들은 공공성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안정적인 고용과 보수라는 혜택을 누리지만, 늘 방만한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각종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어 왔다.
 
실제로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공공기관의 임직원들은 비효율적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최고수준의 보수를 받고, 엄청난 적자와 공공부채를 누적시켜 왔다. 공영방송은 막대한 수신료를 지원받으면서도 공익과는 동떨어진 편행되고 불공정한 보도를 일삼고, 공교육기관은 극단적으로 편향된 이념성향을 가진 전교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라는 막강한 공적규제기관을 가졌음에도 금융사고와 금융 비리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모두가 공익증진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공공성의 회복, 공공성의 확대가 필요한 것인가? 과연 공익은 좋고, 사익은 나뿐 것인가?
 
공공성은 대중의 정서적 호감을 사기 쉽다. 사익보다는 공익이 더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터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욕구, 즉 사익추구의 동기와 자신의 이해와 상반되더라도 타인의 필요를 배려해주는 충동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타심이 결여되고 사익추구가 과도한 상태를 탐욕 (greed)이라고 부르고,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이타적인 성향으로 부르고, 이를 도덕적이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대체로 사익추구를 탐욕과 동일시하고, 공익추구를 개인적 이타심이 집단적 성향으로 확대된 결과로 생각한다. 사익보다는 공익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선입견은 여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인들은 사익추구와 이타심이라는 양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익추구라는  자연스러운 성향이 탐욕으로 이어져야할 당위성은 없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는 경쟁, 자유선택, 상호감시의 과정을 통해 일방적으로 탐욕적인 성향을 억제하거나 도태시켜줄 수 있다.
 
반면에 개인의 사적활동 영역을 집단화하여 정부 또는 공적기관에 맡긴다고 해서 탐욕적 성향이 줄어들고, 이타적 행위가 충만한 상태가 될 거라고 믿는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탐욕적 성향의 인간은 어떤 정치체제, 어떤 사회 환경에서도 탐욕적으로 남기 마련이다.
 
라인홀트 니버가 지적한대로 정치적으로 집단화된 공간, 즉 공적기관에서 오히려 탐욕적, 비도덕적, 위선적 성향은 더 강화될 개연성이 커진다. 공적기관은 특성상 독점적 권력이 주어지게 되고, 그럴 경우, 경쟁, 자유선택, 상호감시의 기회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성 강화가 탐욕을 억제하고, 공공복리를 증진시킬 거라는 믿음은 착각이다. 그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정부의 간섭이나 공공부문의 범위를 줄여야 얻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 사회에서 위에서 열거한 사레에서 드러난 대로 무분별하게 제기되는 공공성 확대요구는 매우 걱정스럽고, 냉철하게 재인식되어야 할 문제들이다.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공공성 영역의 존재자체나 최소한의 정부개입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공성의 영역은 치안이나 국방, 특정 사회 인프라와 같은 공공재의 공급,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의 유지, 금융정보의 비대칭성 문제와 같은 명백한 시장실패의 경우, 민간영역에서 이루어지기 불가능한 경우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대홍 |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dtjaang@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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