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자율 위협하는 정치, 대책은?

1. 서론
 
국가와 시장이 경제에서 어떤 정도와 성격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는 근대 국가 및 자본주의의 발달 이래 핵심적인 쟁점의 하나가 되어 왔다. 한국의 경우 국가가 경제를 주도해 오다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김영삼 정부 하에서 잠시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지향하는 개혁들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1997~98년의 외환위기를 분수령으로 해서 재정지출이 크게 증가했고 아울러 시장주의 개혁을 위해 국가의 시장 개입이 역설적으로 증가한 이해 그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 최근의 '경제민주화’의 수사와 정책은 그 단적이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경제에서나 공공부문 규모의 지나친 증가는 사부문의 투자를 구축할 (crowding out)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문제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공공부문의 확대 그리고 국가의 간섭이 질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미명 하에서 사적 영역의 자율에 맡겨졌던 그리고 맡겨야 마땅한 사안에 대해서도 행정부와 입법부의 통제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계속된다면 국가의 직접적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민 자율의 영역은 줄어들게 되고 사부문은 활력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파국적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결정의 범위에 제한을 가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2. 국가의 역습: 양적 측면
 
국가 역습의 증거는 일차적으로 예산과 규제의 증가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정부재정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규모만이 아니라 국내총생산에 대비한 비중도 늘고 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15년도 예산안을 보면 중앙정부의 세출만도 30% 내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부의 재정규모만 보면 공공부문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고 보일 수 있지만, 여기에 지방정부의 예산, 공적 보험, 정부 관리 하의 각종 연기금을 포함하면 이미 엄청난 규모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공부문의 규모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들 공적 기관의 지출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차입으로 충당되고 있다. 그 만큼 사부문의 차입과 투자를 구축(crowd out)할 것이다.
 
경제에서 공공부문이 차지하는 비중만이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규제 또한 계속 증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규제의 강도를 감안한 규제지수를 보아도 정부의 규제는 2011년 잠시 낮아진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정부가 규제 개혁을 외쳐 왔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음을 보여 준다.
 
정부의 규제는 크게 경제적 규제, 사회적 규제, 행정적 규제로 나뉘는데 각기 전체 규제의 1/3 정도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경제적 규제도 전체적인 규제와 비슷하게 점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경제적 규제의 건수가 점증하는 가운데 규제의 규제강도별 비중에는 큰 변화가 없다. 가장 강력한 사전승인과 강한 기준 두 항목을 합치면 최근 수년간 60% 선에서 거의 변화가 없다.

3. 국가개입의 질적 변화
 
국가의 비대화와 개입 증가도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것이 국가의 시장 개입을 당연시하는 정책기조가 행정부 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이른바 '경제민주화’로 대표되는 경제의 정치화이다. 경제민주화는 재분배를 확대하는 한편 대기업에 대한 규제 강화를 골자로 하고 있다. 이 가운데 후자(순환출자 금지, 금산 분리, 중소기업 적합 업종 등) 경제적 합리성 보다는 정치적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투자나 성장 측면에서 이들 정책의 부작용은 단순히 추론이나 이론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드러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대기업을 강제로 퇴출시키거나 신규 진입을 막은 많은 업종에서 국내 중소기업이 아니라 외국계 중소기업이 시장을 장악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또 하나 우려되는 것은 이른바 '사법의 공법화’이다. 사적 계약으로 처리될 수 있는 사안들조차 공적 통제와 규제 하에 두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행정부만이 아니다. 입법부 또한 사적 영역에 대한 공세에 행정부와 가세하거나 혹은 독자적으로 나서고 있다. 16대 국회부터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국회가 발의하여 통과시키는 법안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원입법은 규제를 완화하거나 폐지하는 법안의 비중은 정부발의법안에 비해 적은 반면 기존 규제를 강화하거나 신설하는 비율은 상대적으로 높다. 의원입법의 17%가 규제를 강화하거나 신설하고 있다.
 
국회와 관련하여 더욱 우려스러운 질적 변화는 국회가 고유의 입법 기능과 행정부 견제 기능을 넘어서 사부문, 특히 대기업 길들이기에 나서고 있는 뚜렷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가 기업인에 대한 국정감사 증인 출석 요구이다. 최근 이러한 출석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
 
2011년에는 국회가 출석을 요구한 전체 증인 171명 중 61명이 기업인이었지만 (35.7%), 2011년에는 347명 중 145명 (41.8%), 2013년에는 400여명 중 256명 (약 60%)에 이르렀다. 절대적인 숫자도 비율도 급증하고 있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이러한 출석 요구가 선별적이라는 점이다. 2013년 국정감사에서 국회 산업위원회는 당시 민주당과 상생기구 설치에 합의한 롯데 신동민 회장은 당초의 증인 리스트에서 제외시켜주는 반면 그렇지 않은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은 그대로 출석시켰다. 이 같은 선별적 출석요구는 기업인 길들이기로밖에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4. 국가역습의 원인
 
그렇다면 왜 이런 '국가의 역습’이 일어나는가? 공공부채가 수 백조 원에 이르게 된 상황에서도 예산이 계속 증가하는 것, 정부의 규제개혁 선언에도 불구하고 규제가 증가하고 강화되는 것, 그리고 국회가 입법과 행정부 감시라는 고유한 업무를 벗어나 민간부문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상당부분 관료와 정치인, 정당이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시장의 실패를 불러오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외부효과(externalities)라면, 정부의 경우 실패를 가져오는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내부효과(internalities)이다. 시장행위자들의 계산서에 포함되지 않는 비용과 편익이 시장의 문제라면, 정부의 경우 공익만을 생각해야 할 관료들이 특정 정책, 조치, 규제들이 자신의 편익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고려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 결과 어느 나라에서나 관료들은 예산을 극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게다가 시장과 달리 정부는 좋은 성과지표가 없다. 예산의 효율성이나 타당성을 재기가 어렵다.
  
다른 한편 정치인들의 경우 재선의 가능성을 높이는 게 최대의 관심사이고 정당도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표가 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는 게 합리적이다. 최근 들어 선거경쟁이 격화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시민단체 등에서 법안 발의 건수로 실적을 평가하니까 의원들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법안을 제출한다. 그 결과 한국의 정부발의 대비 의원발의 법안의 비율은 무려 7.22배로 일본의 0.86배 독일의 0.80배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 규제영향평가 등 경제에 대한 영향을 고려하기 위한 까다로운 심사 절차를 거치는 정부입법과 달리 의원입법은 이런 절차가 필요 없기 때문에 규제를 신설, 강화하는 경향이 큰 것도 당연한 결과이다. 정부부처 또한 의원입법의 느슨한 절차를 이용해 '청부입법’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정치인과 정당은 목전의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경제의 건전성이나 장기적 성장보다는 단기적으로 지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대중영합적 강령과 공약을 내건다. 예산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부채가 증가하든 말든 그건 미래에 다른 사람이 걱정할 문제이고 당장에 지지를 늘릴 수 있다면 그만이다. 규제와 관련해서도 득표만 증가시킬 수 있으면 설사 경제에 독이 될 수 있더라도 서슴지 않고 입법화한다. 정치적으로 결정할 사안인지 아닌지도 따지지 않는다. 입법부에서 다룰 일인지 아닌지의 여부도 가리지 않고 국민의 대표라는 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6. 대책
 
미국 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한 사람인 제임즈 매디슨은 “우리가 천사라면 정부도 필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우리가 목독하는 문제들이 관료, 정치인, 정당 등의 합리적인 행동의 비합리적인 사회적 결과라고 한다면, 제도를 통해 이 행동에 일정한 제약을 가할 필요가 있다.
 
우선 재정과 관련해서는 재정 규모에 대한 한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일정기간을 기준으로 균형예산을 의무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GDP의 x%라는 식으로 국가부채에 한도를 설정하는 일도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법안 제출 시 재원 조달 방법 제시를 지금보다 좀 더 강화하여 실행 가능한 구체적인 방법을 명시케 할 필요가 있다. 같은 원칙을 모든 선거의 모든 후보자의 공약에도 적용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가의 영역과 시장의 영역을 분명히 해 이를 법제도적으로 확정하는 일이다. 무엇은 정치적으로 결정할 수 있고 무엇은 정치적 결정의 대상이 아닌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앞의 원인 분석에 비추어 어느 합리적인 관료, 어느 합리적인 정치인이 자신들의 손발에 족쇄를 채울 이런 대책을 마련할까? 거의 무망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피를 공급해야 한다. '작은 정부, 큰 시장’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인식공동체’(epistemic community)가 중심이 되어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새로운 정치인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영조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yjlee@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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