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6·25국군포로가족회(이하 가족회, 회장 한영복) 회원들은 지난 7월부터 국방부 西門(서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가족회 회원들은 6·25남침전쟁 때 北에 불법 억류된 국군포로의 2세들이다. 시위 참석자 중 대부분은 2003~2007년 경 탈북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20여 명의 가족회 회원들은 “국군포로 자녀들은 고아가 아니다”, “선친의 제적등본에 등재할 수 있도록 戰死(전사)일자를 정정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었다. “정부와 국방부는 미귀환 국군포로의 명예회복과 그 자녀들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라”는 플래카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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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의 孤兒(고아) 신분

가족회가 국방부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주된 이유는 부친(국군포로)에 대한 戰死일자를 정정해달라는 것이다. 현재 가족회 회원의 부친 중 일부는 국방부의 DNA 테스트 등을 통해 국군포로로 확인되었고, 이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가족회 회원들은 일괄 적용된 戰死(사망)일자 때문에 자신들이 국가유공자 자녀로 대우(연금 등 금전적 지원)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 국방부는 국군포로들의 戰死일자를 1950년 6월25일로 일괄적용했다. 국군포로 2세들 대부분은 1960년 전후에 태어났다. 즉, 부친이 사망한 뒤에 태어난 것이 되므로 법적으로 직계존속 관계가 不성립한다. 이들은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국가유공자 유족등록 신청’을 제기했지만 앞서 언급한 戰死일자 때문에 기각 처분을 받았다. 가족회 회원들은 이런 이유로 자신들을 “사실상의 孤兒(고아)”라고 지칭했다.

국군포로와 2세들의 비참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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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복 씨
 

이들은 북한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국군포로의 자녀란 이유로 ‘간첩 자식’, ‘美製(미제) 간첩’이란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군대에도 이들은 국군포로의 자식이란 이유로 갈 수 없었다. 韓 회장은 “국군포로와 그 자녀들은 함경북도 온성·회령 등지의 탄광에서 勞役(노역)하며 처참한 생활을 하다 죽어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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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익 씨

가족회 회원 중 한 명인 김홍익(1996년 탈북) 씨는 함경북도 온성의 탄광마을에 살면서 아버지와 함께 노역에 끌려다녔다고 한다. 북한의 탄광은 시설이 워낙 열악해 폭발사고, 線路(선로) 붕괴 사고가 多發(다발)했다고 한다. 이런 사고가 터질 때마다 보위부 요원들은 국군포로 출신인 金 씨의 부친을 의심했다고 한다. 부친이 사망한 뒤 그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데리고 두만강을 渡江(도강), 탈북을 시도했다. 탈북 과정에서 두 동생은 붙잡혀 北送(북송)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온성에서 귀순한 탈북자를 통해 두 동생의 처참한 최후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는 “남동생은 곧바로 총살되었고, 여동생은 20여 일간 매를 맞아 정신병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탈북하다 적발되면 銃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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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금 씨

이순금(2004년 탈북) 씨는 부친이 노역하던 함경북도 은덕(경흥)군 ‘아오지 탄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보위부 요원은 李 씨의 아버지를 매일 감시했는데 아버지를 ‘간첩 두목’이라 부르며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李 씨의 부친 역시 김홍익 씨 부친처럼 탄광 내에서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그 배후로 의심받았다고 한다. 李 씨의 남동생이 ‘조국이 통일되면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말한 것이 발각돼 부친과 남동생이 보위부로 끌려갔고, 결국 총살당했다고 한다.

‘국군포로 자녀들이 탈북을 하다 적발되면 바로 총살된다는 게 사실이냐’는 질문에 이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일반 북한 주민들이 탈북하다 적발되면 교화소나 수용소로 보내어져 思想(사상)교육을 받지만, 국군포로 자녀들은 거의 예외없이 총살당한다는 것이다.

銃傷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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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씨

이복남(가족회 사무국장) 씨의 부친도 갖은 노역을 했다고 한다. 1994년 아버지와 탈북하다 적발돼 자신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李 씨 부친은 보위부에서 총살을 당했고, 자신은 銃傷(총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귀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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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씨가 탈북과정에서 입은 頭部의 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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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순(2004년 탈북) 씨와 그의 부친은 ‘고향(남한)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돼 15년을 복역했다고 한다. 국군포로 출신이란 이유로 아버지는 外家 (외가)식구들로부터 갖은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金 씨는 “나도 국군포로 출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출신배경 때문에 어렸을 적, 내 자신이 비참하단 생각을 수 없이 많이했다”고 회고했다.


국군포로 3세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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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숙 씨

윤인숙(2007년 탈북) 씨도 아버지 때문에 평생을 감시 속에서 살았다고 했다. 1997년 사망한 아버지는 탄광만 전전해 임종 직전엔 이빨이 다 빠졌다고 한다. 그 역시 평생 부친을 원망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국군포로와 그 2세들만 비참한 삶을 산 것이 아니다. 취재 도중 한 국군포로 3세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김영희(가명·2004년 탈북) 씨의 열한 살된 아들은 아직도 북한에 있다고 한다. 중국을 통해 탈북을 시도하다 적발돼 아들은 北送되었고, 현재 生死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한영복 회장에 따르면, 가족회 회원 대부분이 生業(생업)을 뒤로 한 채 시위에 나왔다고 한다. 한 회장은 “북한은 물난리 속에서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지켰다는 이유로 영웅 대접을 해주지만, 대한민국은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해준 게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일반 탈북자 중에는 북한에서 호의호식하다 온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온갖 고초만 겪었다. 탈북자 중에서도 가장 下層(하층)에 속한다”고도 했다.

‘회원들이 힘이 있었다면…’

記者는 취재 도중 한 경찰 간부를 만났다. 그는 회원들이 시위 도중 불미스러운 일을 벌일지 몰라 항상 시위 장소에 나와 이들을 통제한다고 했다. 그는 “만약 이 분들(가족회 회원)이 힘이 있거나 회원 수가 많았다면 국방부가 이렇게 외면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尹 일병 사건 이후 소위 軍 인권단체 등 左派(좌파)단체가 국방부 앞에서 자주 시위를 했다. 그때마다 해당 부서 공무원들이 직접 나와 단체 관계자들과 만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가족회 회원들이 두 달 간 시위를 벌여도 해당 부서는 본 체 만 체였다. 만약 가족회 회원들이 힘 있는 사람을 끼고 있었거나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국방부는 <조갑제닷컴>으로 ‘국군포로 가족회 요구사항 대한 검토’란 설명자료를 9월23일 이메일로 송부했다. 국방부는 ▲미귀환 국군포로의 자녀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불가 ▲아버지 보수·연금을 자녀에게 지급 요구 수용불가 ▲호적등본에 등재할 수 있도록 戰死일자 정정 요구 일부 수용 입장을 밝혔다(하단에 全文 게재).●




국군포로 가족회 요구사항에 대한 검토

󰊱 미귀환 국군포로의 명예회복과 자녀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 수용불가

  ◦특별법이란 특정한 지역, 사람, 사물, 사항에 국한하여 적용하는 법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시「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은 他법에 대한 특별법임
    ∙적용 대상이 국군포로 및 억류지출신 포로가족에 한정되어 있고, 국군포로와 가족의 송환 및 지원에 관한 특별한 사항을 정하고 있으며, 타법보다 우선한다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음
        * (국군포로법 제4조) 이 법과 다른 법률의 규정이 서로 다른 경우에는 이 법의 규정을 우선하여 적용
  ◦동법이 타법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원을 하는 사항은 다음과 같음  
     ∙국군포로 및 가족에 대한 송환 지원, 위로지원금, 주거지원금, 가족 지원금 등 각종 지원금 지급이 이에 해당
  ◦따라서, 동법에 대한 내용을 변경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동법을 개정하는 것이 적절하지, 또 다른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음
        * 현재 황진하 의원은 억류지출신 포로가족 지원금(4,790만원)을 상향하기 위한 법개정을 추진중에 있음(국방위 소위 계류중)

󰊲 아버지 보수·연금을 자녀에게 지급 요구 : 수용불가

  ◦생환한 국군포로에 대한 지원은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 제6조에 따라 등록한 후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으로 사망하였을 경우에는 등록 자체가 불가
       * (국군포로법 제6조 제2항) 6.25 당시 국군이었던 자가 귀환하였다 하더라도 정부합동신문을 통해 월북, 투항, 피포‧在北 기간중 고의로 국군에게 피해를 주거나 북한체제에 적극 동조한 자 등은 국군포로 등록 대상에서 배제
  ◦또한, 이는 생환한 국군포로가 국내에 잘 정착하고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원하는 제도로, 배우자 또는 자녀에게 지원하는 것은 아님
     ∙대신, 배우자 및 자녀에게는 「국군포로법」 제15조에 따라 4,790만원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제도가 별도로 있음
         * 억류지 출신 포로 가족은 탈북자 지원금(3,700만원)을 합할 경우 총 8,490만원을 旣 지급받았음
  ◦아울러, 전몰군경 유가족 등 他 보훈가족의 경우에도 전사하신 아버지에 대한 보상을 유가족에게 하고 있지 않은 바, 이 분들과의 형평성도 고려할 필요
         * 他법(「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의 경우에도 당사자의 보상과 유가족 보상은 구분되어 있으며, 당사자 보상을 유가족에게 지급하고 있지 않음

󰊳 호적등본에 등재할 수 있도록 戰死일자 정정 요구 : 일부수용

  ◦재북 국군포로 사망일자는 객관적인 입증이 불가하며, 전사처리 취소 시 국내 가족의 보훈혜택 제공 근거가 사라짐에 따라 대규모 민원 야기 우려
. ∙대안으로 北 가족의 행정상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병적증명서 비고란에 ‘실제 사망 추정일’ 표시 등 보완조치
  ◦특히, 대법원은 호적변경은 재판절차를 통해 해결할 사안으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재남 가족과의 관계 등을 감안하여 신중히 검토하여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실무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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