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나라의 백년대계이며 경제. 문화, 사회, 정치수준의 척도이다. 따라서 이의 성패는 곧바로 국가발전과 국민의식의 질적 향상 여부로 직결된다. 무릇 국가는 교육을 기반으로 발전하고 교육의 향상으로 국력을 다져나가게 된다. 교육의 제 역할 없이는 그 어떤 국가적 희망과 국민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이 특정 개인의 몰지각한 판단과 전근대적 이념성향과 그리고 분단현실에서의 반국가 목적적 선동의 일환으로 개악될 수 있겠는가,

자립형 사립고는 이전 정권의 교육방침으로서 교육의 하향평준화를 보완하는 최소한의 대책이었다. 이러한 대책은 교육계가 스스로 마련하여 나라 백년대계를 꾸려야 할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희연은 유지되었던 대책을 육성해 나가기는 커녕 특정한 목적에 의해서 이를 일방적으로 폐기하여 교육의 후진화를 의도하려 한다.

선의의 경쟁은 학습에서의 필수적 수단이다. 경쟁 없는 학습은 수단을 포기한 것으로서 학습의 의미를 본래적으로 퇴색케 한다. 물론 수단 없는 학습의 목적 또한 존립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경쟁과 협력이 양립하여 조화로운 구조가 되는 것은 사회부문의 수단이다. 교육과 학습만의 특성이 경쟁이란 수단으로 논의되어지는 이유이다. 경쟁이 학습에서의 중요한 요소로 되는 것은 인류문화에 기원한다. 인류 발전사에서 경쟁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무엇으로 비교될 수 없다. 이러한 경쟁을 원초적으로 부정하고 학습의 의미를 세우려는 조희연의 의도는 실로 국가적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주장하는 소위 수평적 평준화란, 학습자들로 하여금 경쟁의식을 포기케 하여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불식시켜 개별적 사회적으로 발전과 성장을 억제하려는 반사회 반국가적 의도로도 볼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 평준화는 하향 평준화의 또 다른 의미인 것을 조희연 특유의 이념성 언어로 포장하여 공표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또한 수평적 평준화의 상반용어로서 수직적 평준화란 용어를 도출해 냈다. 그야말로 억지 논리이다. 상향식 평준화 - 하향식 평준화를 의도적으로 수직적 평준화 - 수평적 평준화란 용어로 둔갑시킨 것이 아닐까?

수직적 평준화란 그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계급적 논리인 것이다. 교육을 계급적 틀에 억지로 꿰맞추려는 그의 의도는 미래를 지향하는 국민의식이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순수한 교육을 계급틀로써 유인하여 시민 저변층을 선동하려는 술책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을 구세기 노예적 수준으로 파악하는 그의 정치적 수준은 파멸로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다. 조희연은 더 이상 시민들을 우롱하지 말고 대한민국 국민이 진정한 자유 시민임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평준화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지난시기의 평준화란 과열 경쟁을 방지하고자 고육지책으로 일궈낸 과열방지용 물 뿌리기였다. 이것 역시 모든 부문에서 앞서간 교육열을 당시의 미숙한 구조가 따라가지 못하여 단행한 미봉책이었다. 동서고금 교육열은 한 국가의 희망의 등불이다. 이 교육열을 의도적으로 강하시킨다는 것은 국가발전 속력을 깍아 내림은 물론 개인의 자아를 뭉개버리는 씻을 수 없는 불합리한 결단이다. 당시의 경제수준이 조금이라도 뒷받침 되었다면 평준화라는 용어는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열악한 후위의 학교들이 경쟁의식의 활성화로 발전을 거듭하여 상향식 평준화를 일궈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쟁의 원리이다. 물론 학연과 학벌의 구조개혁 필요성은 별론이다.

이러한 미봉책이 당시 군사정권의 교육시책이었다면 조희연이 다시금 군사정권의 교육시책을 모방하는 모양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조희연은 과거 군사정권을 북녘의 세습정권보다도 더 악독한 군사팟쇼정권이라고 짖어대는 부류이다. 현 대한민국의 경제사정은 과거 교육평준화를 실시하던 때의 사정과 다르다. 모든 방면에서 국민 의식이 수직상승했으며 교육과 학습에 대한 관점 또한 괄목할 만한 수준이다. 편견이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이다.

자사고 폐지 주장의 논점 또한 유치하기 그지없다. 특수학교인 과학고 외국어고가 상존하고 있는 현재, 자사고 폐지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그의 주장인 수평적평준화 논리와는 배치된다. 자사고는 일반고와 구별되어서 안 되고 특수학교는 일반고 수준이어서 논외로 할 수 있다는 논리는 가히 주목해 볼만하다.

북녘의 교육제도를 벤치마킹한다면 지금의 소위 수평적평준화란 어휘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북녘은 이미 지역별, 성향별, 수준별 차등교육이 심화된 상태이다. 그는 양심선언으로써 교육에서의 가치 중립화를 포기하고 통일전선 객체에서 벗어난 연후에 선출직인 교육감 직책을 수행하여야 한다.

칼럼니스트 이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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