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 19일. 남한에서 40년이 넘게 생활했던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가 북송됐다. 북으로의 귀환을 희망해 송환된 최초의 케이스다.

 

리인모의 검거 당시 재판기록에 따르면 그는 경상남도 내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의용군에 강제 모집돼 전선에 투입되고, 이후 1950년 9·28 서울수복 후에는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있다.

 

반면 북한은 리인모가 해방 후 노동당에 입당하면서 공산주의 활동에 뛰어들었고, 50년 한국전쟁이 발발, 인민군 문화부 소속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본대와 연락이 끊기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찌됐든 리인모는 6.25전쟁에 참전했다 1952년 체포돼 비전향을 고집, 34년간 복역 했고 1988년에 출소했다.

 

1952년 빨치산 토벌대에 의해 검거돼 7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1959년 출소했지만 1961년 6월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혐의로 붙잡혀 15년형을 선고받아 실형을 살고도 두 차례나 더 복역하는 등 총 34년간 옥살이를 한 뒤 88년 석방된 것이다.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지자 북한은 1991년 9월 대남방송인 ‘평양방송’을 통해 이인모의 송환을 요구한다. 이후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등에서 이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이에 1992년 6월 당시 노태우 정부는 광복절을 전후해 성사시키기로 북한과 합의한 고향방문단 상호교환사업의 사전 분위기 조성을 위해 이인모의 송환을 적극 검토했다. 그러나 당시 다른 비전향장기수와의 형평성 문제, 북한의 상응한 조처, 국가보안법 규정 등 때문에 송환이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3년 김영삼 정부는 이산가족문제 해결과 신뢰회복 등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34년간 수감 후 출소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를 조건 없이 북송하기로 결정해 판문점을 통해 보냈다.

 

어찌됐든 이인모는 북한의 필요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됐다.

 

돌아오자마자 북한은 그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온갖 정치선전에 이용했다. 북한은 이인모를 “수십년 동안 오직 당과 수령을 위해 적들의 모진 고문과 박해를 참아가며 감옥에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간직한 불굴의 투사”라고 선전했다.

 

송환된 뒤에는 한국 전쟁 전 결혼했던 부인과 딸이 북에 남아 있어 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북한은 리인모와 그의 가족에게 여러 가지 특혜를 베풀면서 “끝까지 신념을 간직한 자는 이러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북한주민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당과 수령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강요했다.

 

그를 혁명가의 표본으로 내세워 전체 북한 주민들이 따라 배우도록 정책화한 것이다. ‘김일성훈장’과 ‘영웅칭호’, ‘국기훈장 1급’이 수여됐고, 고위간부들이 이용한다는 봉화진료소에서 진료를 받고 이례적으로 신병 치료차 미국에도 다녀오는 등 특혜를 받았다.

 

리인모를 소재로 한 영화와 가요도 제작됐고, 그의 모교인 파발인민학교(현재 량강도 김형직군 소재)는 '리인모인민학교'로 개명되는 북한 당국의 파격적인 조치는 이어졌다.

 

그러나 이같은 북한 정권의 융숭한 대접은 이 씨의 언행 한 마디에 중단됐다는 주장도 있다.

 

리인모 북한의 교화소를 둘러보고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진 후 그를 활용한 모든 선전활동이 중단됐고 이후 그는 사회와 고립돼 외롭게 연명하다 2007년 6월 생을 마쳤다는 주장도 있다.

 

리인모의 이같은 발언은 북한의 ‘특별 교화소’ 시설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리인모는 2007년 6월 사망했다. 북한에서 밝힌 사망이유는 ‘남조선의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리인모의 당시 나이가 89세였다. 대한민국 평균수명을 훨씬 상회한다.

 

그가 죽은 후 2008년 평양 통일거리에는 리인모의 동상이 건립됐다. 죽어서도 리인모는 북한의 체제 선전을 위해 이용된 것이다.

 

1993년 리인모를 북송한 지 불과 3일 후에 북한은 NPT(핵확산방지기구)를 탈퇴하겠다고 나섰다. 사실상 리인모는 시작부터 철저하게 혼란을 앞둔 북한에게 있어 체제 결속 강화를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북한으로 건너간 리인모는 거짓으로 남한의 실상을 전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폐쇄된 북한의 실상과 인권유린의 현장을 알면서도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소개했을까.

 

김정일이 죽고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100일간의 유람을 마치고 돌아온 범민련 남측본부의 노수희는 100일간 북한의 극히 일부를 맛봤다.

 

노수희라고 그 일부가 북한의 참모습이고, 전부라고 생각했을 리가 없다. 여전히 평양 등을 비롯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주민이 기본권마저 보장 받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모르겠는가.

 

리인모는 청년기 이후를 북한에 충성한 삶을 살았지만 그가 돌아간 북한이 수령독재사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고뇌를 했을지 궁금하다. 아니 리인모는 과연 북한 체제를 동경했을까. 볼모로 잡혀있는 가족들을 위해 돌아간 게 아닐까.

 

남파간첩은 물론, 지하당이나 종북 서클 조직원이 북의 실상과 주체사상의 허구성을 깨닫고도 자수나 전향을 못하는 까닭과 같지 않을까.

 

표면적으로는 혁명적 지조, 혁명적 의리, 조직보위와 동지애에 깊이 세뇌 됐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인질로 잡힌 가족의 안전, 엄격한 감시와 냉혹한 비판, 당과 조직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 약점에 대한 폭로 위협과 이탈 배신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 공포가 전향을 못하는 이유가 아니던가.

 

북한에서는 1990년대 이후 경제난으로 체제가 흔들리고 외부 정보가 급격히 유입되면서, 남한 드라마를 복제하거나 중국과 내통한 사람을 시범적으로 공개 처형됐다. 정치범에 대한 사형 집행은 보위부 내부에 있는 지하감옥에서, 고무방망이로 죽을 때까지 머리를 때리는 잔혹한 방법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나 나올 수 있는 곳. 그 끔찍한 곳이 북한에 아직 있다는 사실에 리인모는 절망했을 것이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는 아직도 수십만명의 정치범과 그 가족들이 수감돼 있다.

 

리인모는 남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참한 북한의 현실을 마주했을 때, 북한이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리인모가 꿈꿨던 고향이, 낙원이 과연 거기에 있었을까.

 

‘종북’으로 알려진 이들이 국회에서, 방송에서 나와 떠드는 화면을 TV로 본다. 이들은 리인모가 1993년 맞이했던 진실의 순간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 끔찍한 감옥에서 절대 다수의 주민들을 속이며 북한이 지상 천국인양 외치는 것이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김승근 편집장 hem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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