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함흥시 회상구역 제9호 교화소

 
제9호 교화소로 이감된 때는 2002년 10월이었다. 이감될 때는 사람을 짐승이나 물건처럼 취급한다. 공민증도 박탈당한 우리 같은 죄수들을 이감시킬 때 그들은 영수증을 주고받는다. 교화소로 들어가면, 보안원들은 “너희들은 반국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제부터 짐승”이라고 말하고, 길을 걸어갈 때도 보안원의 얼굴은 볼 수 없다. 앞을 보고 걷다가도 보안원이 다가오면 그가 지나갈 때까지 고개 숙이고 바닥만 봐야 한다.


그들의 얼굴을 쳐다볼 경우, 군홧발부터 날아오고, 총탁(개머리판)에 머리를 후려 맞는다. 그런 곳에서 2년을 갇혀 있는 동안, 3년 대사(사면)를 받았고, 일을 잘해서 1년이 더 줄어서 2004년 10월에 풀려났다.

남한에 와서 꼭 가보고 싶은 곳 가운데 하나가 교도소다. 이곳에서 수감자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가 너무 궁금하기 때문이다. 내가 듣기로는 교도소에서도 기술을 배우고 일만 잘하면 얼마간의 돈도 모아 나올 수 있고, 텔레비전, 신문, 잡지도 볼 수 있고, 일반사회와는 격리되어 있지만 인권유린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하는데 북한에서의 끔찍했던 교화소 생활을 떠올려보면 언뜻 믿겨지지 않는 일이다.

제9호 교화소에는 대략 1,500명 정도의 남자들이 수감되어 있었고 1반부터 10반까지로 나뉘어 있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오전 8시쯤 야외작업을 나갔다가 오후 6시 30분에 돌아와 저녁밥을 먹고, 보통 10시까지 고개를 숙이고 꼼짝 못하고 앉아 있어야 했다. 취침시간이  지나도 그 날 담당보안원이 자라고 할 때까지 자리에 누울 수 없다.

북한에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생일 등 “4대 명절”이 있는데, 그런 날만은 우리를 통제하는 보안원들도 술을 마셔 기분이 좋아진 터라 편히 앉도록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불과 몇 번의 큰 명절 때만 그렇고 다른 날들엔 계속 머리를 숙이고 무릎 꿇고 앉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교화소에서는 밥을 찍어서 준다. 그렇게 밥을 찍어내는 기계가 있다. 통강냉이, 콩 등을 혼합해 삶은 것을 일반 컵 높이보다 더 낮게 만든 작은 용기로 찍어 내어 끼니때마다 한 사람당 한 개씩 준다. 각 호실 문 아래에는 작은 배식구가 나 있는데, 그곳으로 손을 내밀면 밥을 넣어준다. 교화소에서는 수감자들로 꾸려진 배식반이 있는데, 이들이 밥통, 국통을 가마차에 끌고 다니며 공급한다.

멀건 국에는 소금도 넣어주지 않는다. 소금을 먹으면 다리에 힘이 생겨 탈출을 시도한다고 해서 안 주는 것이다. 교화소에서 몰래 소금을 훔쳐 먹다 들키면 독감방으로 보내지고. 못 먹던 소금을 갑자기 많이 먹은 부작용으로 몸이 퉁퉁 부어올라 죽기도 한다.

다른 교화소는 피복도 생산하는데 내가 있던 교화소에서는 원래 “쌍마”라는 재봉기를 생산했다. 하지만 자재 공급이 제대로 안 되다보니 더 이상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김정일은 ‘죄수들을 동원해 무엇이든지 자체로 생산해 팔아먹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흙으로 토피집(흙벽돌집)을 짓는데 쓰이는 블록(벽돌)을 찍어냈다.

교화소 밖으로 블록을 내다 팔아 번 돈으로 쌀을 사들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 돈이 그렇게 쓰였는지, 다른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매일 땅을 파고, 블록을 1,000장씩 찍어내야 했는데, 할당량을 못 채우면 밥을 줄이는 벌을 줬다. 죽도록 일도 해야 하고 배도 고파서 너무나 힘들었다. 오후 3~4시경에는 중참시간이 있어서 남새(채소)밭, 뙈기밭(자투리땅에 일군 밭)에 가서 배추나 무를 뽑아 씻지도 않고 물렁해질 때까지 삶아서 먹는데, 너무 배가 고프다보니 그게 그렇게 맛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배고픔을 달랠 수 없다보니 배추를 삶기 전에 따서 버린 꽁다리도 주워 먹곤 했다. 하지만 보안원들은 배추꽁다리는 땅에 묻도록 시키는데, 그들 말로는 배추꽁다리를 먹으면 병이 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있던 교화소에는 바깥의 가족들이 먹을 것을 좀 들여보낼 수는 있었다. 북한에서는 “속도전가루”라고 부르는 강냉이가루를 주로 들여보내는데, 바깥에서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배추꽁다리라도 주워 먹는 수밖에 없다.

나도 배추꽁다리는 물론 쥐도 잡아먹어봤다. 너무 배가 고픈 탓이기도 했겠지만 불에 구운 쥐가 얼마나 구수한 맛이 나는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수감자들이 지내는 방 안에는 변기통이 하나씩 있다. 잡혀오는 사람은 늘고 자리는 모자라다 보니 처음 들어가면 온갖 역겨운 냄새를 다 맡으며 변기통 쪽에서 자는 수밖에 없고, 새 사람이 들어오면 거기서 조금씩 떨어진 자리로 들어가는 식으로 잠자리가 옮겨진다. 굶주림 탓에 사람들은 변기통에 버려진 것도 주워 먹고, 쥐가 변기통을 돌아다니면 그마저 잡아먹는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입에 넣어야 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보안원들은 “너네는 담배맛, 술맛, 여자도 몰라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담배가 너무 간절해 보안원들이 발로 비벼 끈 꽁초를 주워 피우기도 하는데, 걸리면 손이 짓밟히는 것은 예사이다. 보안원이 자기 사무실로 끌고 가 담배꽁초를 물에 풀어 강제로 마시게 하기도 한다. 두들겨 맞지 않자면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고, 역겨워서 토하고, 그 다음엔 속이 뒤집혀 설사하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교화소에서 일은 힘들고, 늘 배고프고, 몸도 돌보지 못하니 모두 허약에 걸린다. 허약이 2~3도 (북한에서는 허약도 1도 2도 3도로 나누어 진단)정도가 되면 항문이 벌어지는 지경이 되는데, 회복이 안 되면 3~4일 만에 죽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는다.

<b>계속된 죽음, 불타는 시체들</b>

북한사람들은 1994년 김일성 사망이후 부터 경제가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또 연속적으로 자연재해를 겪으며 식량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그 “고난의 행군” 시기를 보내면서 1998~1999년까지 죽을 사람들은 다 죽어나갔고, 어떻게든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곳이 있다. 다름 아닌 교화소 같은 곳들이다.

교화소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가족들이 시체를 찾아가지 못하도록 불에 태워버린다. 나는 군 경력 덕분에 반장을 맡아 근로사업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을 잘 안다. 교화소 안에는 벽돌로 쌓은 높은 굴뚝이 있는 집이 있다. 한쪽에 시체를 쌓아놓는데 20~30구 정도가 차면, 보안원들은 수감자들에게 장작을 가져오게 해서 디젤을 뿌린 뒤 불을 놓는다. 시체를 땅에 묻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리는 것이다.

교화소에서 형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죽어버린 사람과 그 가족들에게는 “역적집안”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런 문건은 그 자식들에게까지 평생 따라다닌다. 자기 가족이 교화소에서 억울하게 죽었는데 어느 누구인들 국가에 대한 원한을 품지 않겠는가? 그래서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역적집안”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것이다.

박대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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