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최근 서울시 무상급식 찬반투표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하면서 또다시 위기감에 휩싸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전 10년 동안 풍찬노숙을 하며 좌파와 다투면서 승리를 일구어 낸지 4년도 안되어 또다시 ‘루저(LOSER)’의 위치로 주저앉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절박함과 회한이 가득하다.

지금이야말로 새롭게 찾아온 보수의 위기임에 틀림없다. 지금 민심의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안철수 현상’이 그렇다. ‘안철수 현상’이 ‘反(반)보수적’이냐 하는데 있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전형적인 ‘親(친)보수적’ 현상이 아님이 분명하다. 따라서 ‘非(비)보수적’ 현상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데 보수의 고민이 있다.(중략)

일련의 선거패배는 보수의 실패 아닌 ‘이명박의 실패’

생각해 보면, 최근 연달아 일어난 선거 실패는 ‘보수의 실패’라기 보다는 ‘이명박 정부의 실패’이고 또 ‘한나라당의 실패’로 보아야 옳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보수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신뢰 속에 권력과 정권을 잡았으나, 권력을 위한 권력이라는 ‘권력의지’만 있었을 뿐, 보수의 정체성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그 권력의 방향성과 원칙, 그리고 목적성이 뚜렷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명박 정부를 항해하는 배로 친다면, 이명박 號(호)는 가야할 항구가 어디인지 몰랐기 때문에 결국은 우왕좌앙하며 바다를 정처없이 해매는 一葉片舟(일엽편주)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항구로 간다는 뚜렷한 목적의식과 방향성이 없으니, 어떤 바람이 불어도 순풍이 될 수는 없었다. 이미 2000년 전 로마의 세네카는 ‘어떤 항구로 가는지 그 목적지를 모르는 배에게 순풍이랑 있을 수 없다(ignoranti quem portum petat, nullus ventus est)’고 설파하지 않았던가.

가야할 항구를 모른 채 출범한 이 정부는 開口一聲(개구일성)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중도실용’과 ‘親(친)서민’을 내세웠다. 그와 같은 화두로 일시적으로 민심을 잡고 인기를 얻은 것이 사실이지만, 단명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목적이 뚜렷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권이 운명이 아니던가. 화살을 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의 화살이 무엇을 겨누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정부와 한나라당은 행정부 권력과 의회 권력까지 거머쥐었지만,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다모클레스의 검(sword of Damokles)’과 같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다모클레스의 검’이라고 하는 것은 기원전 4세기 시칠리아의 왕 디오니시오스의 일화에서 나온 개념이다. 그의 신하였던 다모클레스는 왕의 직위와 행복을 질투했으나 이를 내색하지 않은 채 아첨으로 일관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목표의식 없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어느 날 디오니시오스는 호화로운 연회에 다모클레스를 초대해 그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왕의 생활을 해보라고 권한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다모클레스는 왕의 제안대로 화려한 생활과 향락 즐기게 된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앉아 있는 옥좌 위로 가느다란 말총으로 매단 劍(검)이 걸려있음을 발견한다. 다모클레스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던 디오니시오스의 계산이었다.

한 순간에 정황을 파악한 다모클레스는 겉으로 권력과 부를 모두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권력자의 자리가 사실은 불안과 위기, 긴장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자리임을 깨닫고 재빨리 도망쳐버렸다. 바로 이와 같은 엄숙함과 절박성을 가진 권력의 존재이유를 깨닫지 못한 것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화근이 된 것이다.(중략)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목표의식 없이 권력만 좇다보니 보수를 흡사 ‘집토끼’처럼 치부한 나머지 ‘산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이유로 경시하고 혹여 어려움이 닥치면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 고작이었다. 소통도 없었고 노무현 정부 시대에 유행했던 그 알량한 協治(협치)의 개념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보수도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을 친근하게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나오는 ‘피그말리온’의 ‘갈라티아’처럼 간주한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결코 보수의 ‘큰 바위 얼굴’이나 ‘分身(분신)’과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보수는 이 정부와 한나라당을 통해 대한민국 공동체에 바른 역사관, 국가관, 안보관, 애국심이 널리 퍼지기를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교만함으로 인해 실패함으로써 또다시 믿었던 우군으로부터 배신감을 곱씹으며 신뢰를 접고 스스로 두 발로 서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 보수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다고 할 수밖에 없으리라.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풍찬노숙을 하더니 이명박 정부 때는 무관심과 경시의 대상이 된 것이다.(중략)

지금 보수에게 미래를 이야기하고 희망을 말할 수 있다면, 그 근거가 무엇일까. 하늘은 잔뜩 흐렸고 곧 폭우가 쏟아질 기세다. 좌파시민운동을 대변하던 시민운동가가 커다란 표차로 서울시장이 되었고, ‘안철수 현상’이 시대정신인 양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태는 보수에게 있어 흡사 ‘대홍수’와 비슷한 상황이다. 아닌 게 아니라 ‘대홍수’라고 하니, 성경 창세기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바이블에 나오는 대홍수는 재앙이었지만, 동시에 희망의 싹을 키웠다. 바로 그것이 ‘노아의 방주(方舟)’가 아닌가. 사방에서 밤낮없이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은 ‘노아의 방주’였다. 바이블에서는 이 폭우를 대비하기 위해 노아가 가족 및 동물들과 함께 피신할 수 있는 아늑하고 따뜻한 삶의 공간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 보수가 이 시점에서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것이다. 그 안에서 보수는 젊은이들을 양성하고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보수의 꿈과 미래, 희망을 만들어 가야 한다. 실제로 젊은이들 가운데는 전교조식 교육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갖고 우파적 가치교육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또 기성세대와 달리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출현은 반가운 일이다. 이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소통하면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노아의 방주’와 관련, 네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보수는 자부심을 가지면서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자부심과 자기정체성이라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과 추구해 온 가치에 대한 진정성을 고백하는 데서 시작한다. 보수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과 또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대한민국 공동체의 자유와 번영을 기약하는 길이었음을 굳게 믿고 의심치 말아야 한다. 약자(弱者)에 대한 따뜻한 배려정신을 가지면서도 자구노력을 통해서 국가의 부(富)를 쌓고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 자유와 번영의 영역을 넓힌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중략)

둘째, 보수는 정부나 정당에 의존하지 않고 보수 나름의 ‘진지(陣地)’를 만들어야 한다. 보수는 가치이고 비전이며 동시에 정책이고 세력이다. 따라서 보수는 정당과도 다르고 정권과도 다르다. 그럼에도 보수가 특정 정권이나 정당에만 의존하고자 한다면, 자율적으로 비전과 역사를 만드는 힘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정권이나 정당에 모든 것을 의존하게 될 때 야기되는 문제라면, 정권이나 정당이 보수의 비전을 따르지 않거나 보수가 원하는 길을 가지 않을 때 불평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대안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수에게 있어 정권이나 정당이 ‘대변체’에 불과할 뿐, ‘또 다른 나(alter ego, another I)’라든지, 자기분신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중략)

셋째, 보수가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좌를 같이 아우르겠다는, 이른바 ‘좌우동거’ 논리나 ‘중도’로 가겠다는 논리를 버려야 한다. 좌와 우를 아우르겠다고 하는 주장과 시도는 통합과 평화의 관점에서 일부 보수주의자들이 ‘중도’의 이름으로 주창하거나 환영하는 어젠다로서 좌우간에 균형을 유지하고 편견과 치우침이 없는 이념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의의 발상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정체성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시도로 생각되는데, 보수의 방향성과 가치지향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분명 좌와 우는 ‘和而不同(화이부동)’과 ‘(求同存異)구동존이’의 원리에 의해 평화적으로 공존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즉 ‘삶의 방식’이 아닌, ‘삶을 위한 방식’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진보적 가치에 대한 열린 마음도 필요하다.

그러나 좌우를 무차별적으로 아우르겠다는 ‘좌우동거’나 ‘중도지향’은 전혀 다른 개념이며 이질적 어젠다다. 좌우동거를 경계하는 것은 보수가 극우나 극단으로 치닫고 좌파진보와 적대적 대결을 불사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수가 자기정체성과 색깔을 가진 세력으로서 책임 있게 행동하고 자기 자신의 주장과 실적 및 행동을 기반으로 해서 국민들의 신뢰는 물론, 선택과 판단을 받겠다는 당당한 태도다.(중략)

보수가치 공유위한 학습과 교육 조직화해야

넷째, 보수는 일상적인 ‘실천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남이가” 혹은 ‘끼리끼리’의 연고조직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가치와 보수의 가치를 배우고 전수하기 위한 학습조직과 교육조직으로부터 시작된다. 보수적 가치를 공유하고 그 가치에 입각한 정책 지향의 공감대 확산과 조직 형성으로 이어지는 학습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서울지역이나 대도시는 물론, 도농을 가릴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조찬모임, 포럼, 토론, 강연회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소통 채널과 학습조직을 통해 황무지에서 대한민국을 만들고 번영시킨 보수의 가치와 대한민국 역사의 위대함과 조국애를 전파하고 설득하며 교육해야 한다.

보수가 자신의 가치와 이념을 전파하는 스스로의 지역 조직이나 대학, 혹은 젊은 세대에 보수의 이념과 정책을 전파하며 가르치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바로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만일 보수가 이런 인프라나 조직을 만들지 못한다면, 스스로 진정성이 없거나 소명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현재 보수의 활동은, 예를 들면 민노당의 각종 위원회나 좌파의 의식화 MT 규모의 수준과 비교할 때 ‘鳥足之血(조족지혈)’이라고 할 정도로 미미하다. 또 보수의 모임과 조직이 있다고 해도 웰빙체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치열하게 토론하는 토론의 장이나 학습의 도장이 아니라 편안하게 담소하는 사교의 장에 불과할 뿐이다. (이하 생략)

<이 글은 한국논단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저작권자 © 뉴스파인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