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유학을 전수하는 중국유학관 개관
 닉네임 : beercola  2016-10-09 11:14:02   조회: 16420   
공자의 유학을 전수하는 중국유학관 개관


1]. 공자님은 조상이 귀족 출신입니다.



필자도 한국내에서 고려 개국공신으로 참여하신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이후, 조선.대한제국까지 1천년 넘게 한국의 귀족가문으로 이어져 온 파평윤씨 출신인데, 혈통은 좋지만 경제적으로는 부침을 많이 겪은 아버님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님도 당연히 양반가문 출신입니다만, 왕족.양반들의 전통 풍속인 일부다처제 전통으로 필자를 낳은 유모는 양반가문은 아니었고 한약방집 딸(유모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여 부유하여 그런지 유모앞으로 집도 한 채 사주었음.)입니다. 해방이후의 한국 법률과 호적상으로 필자는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혈통임은 맞습니다.



공자(孔子)님은, 선사(先師)의 지위에 계시다가 선성(先聖).문선왕(文宣王)으로 추증되신 후, 세계사적으로는 세계 4대 성인중 한 분이 되신 사상가이시자 교육자이십니다. 은(殷).주(周)시대의 시원유교(始原儒敎)를 이어받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제자백가(諸子百家)중 여러 학파가 병립하는 가운데, 공자님의 유가(儒家)사상은 법가(法家)나 도가(道家).묵가(墨家)등 여러 사상과 병립하다가, 한나라의 국교요 세계종교로 성립된 이후, 동아시아인의 종교.교육.사상.문화에 체화(體化)되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2천년 넘게 동아시아인들에게 관습적.역사적.교육적 국교(國敎)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2]. 공자의 유학을 전수하는 중국유학관 개관


출처: 인민망 한국어판, October 07, 2016


http://kr.people.com.cn/n3/2016/1007/c207466-9123434.html




3]. 다시 되짚어보는 공자님에 대한 여러 백과사전.전문 학술서들의 설명.


1. 한국 두산백과의 설명.


공자[ 孔子 ]


요약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시조.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았다. 인(仁)에 대한 공자의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라는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孝悌)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출생-사망
BC 551 ~ BC 479


중니(仲尼)

본명
구(丘)

국적
중국 노(魯)

활동분야
교육, 철학

출생지
중국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

공자는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鄒邑:지금의 山東省 曲阜의 남동)에서 BC 551년에 출생하였다.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이다.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춘추 말기 사람으로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인(仁)이며,‘극기복례(克己復禮 :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다)'를 그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인(仁)을 단지 도덕규범이 아닌 사회질서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사상으로 생각했다.


. 출처: 공자[孔子] (두산백과)


2. 해외 저자사전의 설명.


공자




공자(孔子, BC 551~BC 479)는 중국 춘추 시대 말기에 활동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 유학의 종장이다.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공(孔)’은 성이며 ‘자(子)’는 존칭이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공자는 불우한 환경에서 일정한 스승도 없이 학문을 익혔다. 관리로서 지위가 오르면서 도덕정치를 주창하며 뜻을 펼치고자 했으나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숱한 좌절을 맛보았다.

56세에 이상을 실현할 군주를 찾아 천하를 떠도는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길에 올랐지만 아무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공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안회, 자하, 자로 등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더욱 힘썼지만 아들 공리가 죽고,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잇달아 죽는 등 만년에 여러 가지 불행을 겪다가 73세가 되던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그가 남긴 말을 모아서『논어』를 편찬했다. 그 외에 공자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등을 엮었으며 『역경(易經)』의 전(傳)을 집필했다.


. 출처: 공자((해외저자사전, 2014. 5., 교보문고))


3. 민중서관 인명사전의 설명


공자[ 孔子 ]










국적
중국

시대
노나라

출생 - 사망
BC 551년(노양공 22년) ~ BC 479년(노애공 16년)

출생지
중국 산동성 곡부현

본명
구(丘)

이명
자 : 중니(仲尼)

직업
사상가, 학자, 정치가

가족관계
아버지 : 숙량흘(叔梁紇)
어머니 : 안징재(顔徵在)
손자 : 자사

관련인물

자로, 증자



춘추 시대의 학자ㆍ정치가ㆍ대사상가ㆍ성인(聖人). 유교의 개조. 노(魯)의 창평향 추읍(昌平鄕 陬邑,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서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顔徵在)씨 사이에서 출생.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더 잘 아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을 청했다. 젊어서 이미 박학다식 하였으며 회계 출납직인 위리(委吏), 목장 경영직인 사직(司職) 등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주(周)의 낙읍(洛邑)을 방문하여 문물을 견학하고 귀국, 명망이 높아지면서 많은 제자가 모였다.

35세 때(昭公 25년) 노에 삼환(三桓 :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제(齊)에 도피, 거기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景公)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적 정치 이상을 말했다. 경공은 공자를 고문으로 임용하여 이를 실시하려 했으나 예절의 번잡과 비현실적임을 지적하여 반대하는 대부(大夫) 안영(晏嬰)의 진언으로 좌절, 실망해서 2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시서예악(詩書禮樂)을 연구하며 제자를 교육하다가 배신(陪臣) 양호(陽虎)가 세력을 잃고 물러난 뒤, 중도재(中都宰)를 거쳐 대사구(大司寇, 사법대신(司法大臣))에 임명되어 제에 빼앗긴 노의 땅을 반환받고, 난신(亂臣)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B.C. 496).

삼환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또 정공이 주위 제국의 계략에 속아 음악(淫樂)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 사임한 뒤 14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위ㆍ송ㆍ조ㆍ정ㆍ진ㆍ채 등 열국을 주유하며 인의(仁義) 정도(正道)에 의한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여 난세(亂世)를 구제하려고 노력했으나, 제후들이 공벌(攻伐)에만 급급, 이해하지 못하므로 다시 귀국(B.C. 484년, 애공(哀公)11)했다. 귀국 후에는 오직 후진 교육과 저술에 전념, 시ㆍ서ㆍ예(詩, 書, 禮) 등을 제정하고 노사(魯史)에 의해 《춘추(春秋)》 주역(周易)을 연(演)하여 《효전(爻傳)》을 지었다.

공자의 역사적 객관적인 생애가 이러함에 비해 그의 내면적인 인격의 완성은 그 자신이 단 한 줄로 표현한 자서전적인 말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삼십이립(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불유구(七十而從心所不踰矩)"에 함축성 있게 나타나 있다. 그는 이미 30대에 일가견을 갖고, 40대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며, 70대에 와서는 마음에 품은 바가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제자는 3천 명으로, 육예(六藝: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를 잘하는 사람이 72명(72는 다수(多數)의 뜻도 있음)이었으며, 그 중에서 뛰어난 이를 공문의 4과 10철(四科十哲ㆍ덕행(德行) : 안회(顏回)ㆍ민손(閔損)ㆍ재백우(再伯牛)ㆍ중궁(仲弓). 언어(言語) : 재예(宰豫)ㆍ자공(子貢)ㆍ정사(政事) : 재구(再求)(자유(子有)), 중전(仲田)(자로(子路)ㆍ자하(子夏)), 문학(文學) : 자유(子遊), 자하(子夏))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증자(曾子)ㆍ자장(子張)ㆍ유자(有子) 등이 있다.

공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의 언행록인 《논어》가 남아 있는데 그 근본은 《인(仁)》으로서 공자 스스로는 이를 단적으로 밝힌 바 없으나 대체로 박애ㆍ덕ㆍ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인도주의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필야정명호(必也正名乎)), 질서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군군신신(君君臣臣)) 본분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진기(盡己)) 남을 부축하며(추기(推己)),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을 비롯한 제덕(諸德)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仁)을 지향(至向)하고 예(禮)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君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小人)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利益)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이고 비상대적(非相對的)임에 비하면 소인은 상대적이요 비보편적(군자주이불비(君子周而不比), 소인비이불주(小人比而不周))이라고 설파, 인간은 인간적으로 2분(二分)하여 생각했다.

그러나 인은 성인(聖人)만이 이룰 수 있는 것으로 공자는 스스로도 인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경원(敬遠)할 만큼 어려운 것임을 암시하였다. 그 자신은 예(禮)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ㆍ온화ㆍ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사상이 현실적ㆍ현세적이어서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각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서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계발시켰다. 그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曾子)ㆍ자사(子思)(공자의 손자 : 중용의 저자로 알려진다.)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의 무제(武帝) 이후 중국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또 한국ㆍ일본 등 중국의 주변 국가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B.C 479년(애공 16년) 74세로 사망, 주수이 상(水水上 :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 북(北)쪽)에 묘가 있다.


. 출처: 공자[孔子]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4. 중국 역대 인명사전이 설명하는 공자님.


공자[ 孔子 ]










출생 - 사망
BC 551년 ~ BC 479년

춘추 시대 노(魯)나라 추읍(陬邑) 사람.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다. 조상은 송나라의 귀족이었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이고,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다. 춘추 시대 말기의 대사상가로, 유가(儒家)의 개조로 추앙받고 있다. 아버지를 일찍 잃어 어릴 때는 빈천(貧賤)했다. 일찍이 위리(委吏)와 승전(乘田), 중도재(中都宰) 등을 역임했고, 노정공(魯定公) 때는 사구(司寇)에 올랐다고 한다. 노나라의 권력을 계환자(季桓子)가 독점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와 송나라, 진(陳)나라, 채(蔡)나라, 초나라 등을 주유하면서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한 때 제자가 3천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름이 전하는 제자만도 70여 명에 이른다.

전하는 말로 일찍이 『시(詩)』와 『서(書)』 등 고대의 문헌을 정리하고, 노나라의 역사인 『춘추(春秋)』를 산정(刪定)하여 중국 제일의 편년체 역사서를 만들었다. 어짊[인(仁)]을 궁극의 정치적, 생활적 목표로 삼아 이를 실천하기 위해 각지를 다니며 군왕(君王)들을 설득했다. 말년인 68살 때 고향 노나라로 돌아와 교육을 통해 자신의 뜻이 후대에 실현되도록 노력했다. 많은 책을 정리하여 교육의 자료로 썼으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도 경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자들이 언행을 모아 기록한 『논어(論語)』가 전해진다.


.출처: 공자[孔子]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5. 신원문화사의 서술.


공자, 유학의 선사[ 先師孔丘 ]



오나라가 오자서와 손무의 다스림으로 강국이 되었을 때, 제나라에서는 경공(景公)이 즉위했다. 그는 안영(安嬰)을 등용해 조정을 개혁하고 나라를 점차 강성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500년, 노(魯)나라가 점차 강대해지자 제나라는 노나라를 제어할 계책을 냈다. 친선 회담 명목으로 노나라 정공(定公)을 협곡(夾谷)으로 불러낸 것이다. 정공은 당시 사구(司寇, 지금의 최고 법관에 해당한다)였던 공자와 함께 가기로 했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며 노나라 추읍(鄹邑, 산동성 곡부시) 사람이다. 춘추 말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가인 동시에 유가학파의 창시자이다. 공자의 선조는 은나라 왕실의 후손이고, 공자의 아버지 흘(紇)은 무장으로 추읍의 대부(大夫)였는데 공자가 세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머니 안씨(顔氏)와 형 맹피(孟皮)를 따라 곡부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자 집안 형편이 상당히 어려워졌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학업을 그만두고 숙손(叔孫)의 소를 방목했다. 숙손의 집에는 장서가 많았는데, 공자는 그 집의 책들을 빌려다 보곤 했다. 그리하여 공자는 점차 학문이 높아져갔고, 이에 따라 명성도 높아져갔다.

공자가 스무 살일 때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 그 소식을 들은 노나라의 소공(昭公)은 잉어 한 마리를 보내어 득남을 축하했다. 소공이 잉어를 보낸 일로 인하여 공자의 명성은 온 곡부에 널리 알려졌다. 이에 계평자(季平子)가 공자를 생육을 관리하는 관리로 임명했고, 그는 부임해서 다섯 가지 조치를 행했다. 그러자 노나라 사람들은 너나 없이 기뻐했으며 외지에 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이사를 와서 노나라의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공자는 서른 살이 채 못 되어 육예(六藝, 예·음악·활쏘기·마차술·서예·수학)에 능통했으며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 등을 비롯한 각종 고전에 밝았다. 이렇게 공자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학자가 되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다. 이에 공자는 서당을 꾸리고 그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신분의 귀천 없이 무릇 배우겠다는 사람은 모두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유교무류(有敎無類)’의 교육 방침을 내세웠다.



공묘(孔廟)의 행단(杏亶)은 대성문과 대성전 사이의 행로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공자의 서당 자리인데 송나라 때 그 자리에 단을 만들고 둘레에 살구나무를 심어 행단이라고 불렀다. 아담하고 고아한 이 건축물은 공자가 교육을 중시한 것에 대한 중요한 표징이다.

공자는 34세 때 낙양으로 가서 도가(道家)의 창시자인 노자(老子)를 만났다. 그로부터 주나라의 예의와 문물제도를 배웠으며, 도가사상에 감탄하며 ‘구름 속의 용’과 같다고 칭찬했다. 기원전 513년, 노나라에서는 ‘삼환(三桓)의 난’이 일어났다. 노나라의 실권을 쥔 계손, 맹손, 숙손 세 가문이 소공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공자는 더 이상 노나라에 있을 수가 없어 제나라로 갔다.

경공은 공자를 환대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물었다. 공자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즉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말로 각자가 자신의 분수와 명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정명(正名) 사상을 내세웠다. 그런데 제나라 재상 안영은 공자의 학설은 일개 서생의 견해에 불과하여 제나라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경공은 안영의 말을 좇아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결국 공자는 노나라로 되돌아와서 글을 가르쳤으며 제자들의 수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기원전 501년, 노나라 정공은 공자를 중부재(中部宰)로 임명했으며 나중에는 사공(司空)으로, 그 다음에는 사구로 승격시켰다. 사구가 된 공자는 제나라가 노나라와 거짓으로 맹약을 맺으려고 하는 것을 간파하고 정공에게 제나라의 음모를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제나라의 요청에 따라 협곡으로 갈 때 장수와 병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떠나도록 했다. 협곡에서 회담을 할 때 공자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노나라는 외교상의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승리감에 도취된 정공은 천하가 태평해졌다고 여기고 나라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매일 풍악을 울리며 주색에 빠져 지냈다. 공자는 정공에게 권고를 하려고 매일 찾아갔다. 그러나 정공은 그를 피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는 위나라, 조나라, 송나라, 정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초나라 등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는데 진나라에서 채나라로 갈 때는 포위를 당해 일주일 동안 끼니를 잇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자는 포부를 버리지 않고 낙천적으로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탔다.

기원전 484년, 공자는 노나라로 되돌아갔다. 애공(哀公)과 계강자(季康子) 등이 그에게 나라 정사에 관한 것들을 묻기는 했지만 등용하지는 않았다. 그후 5년 동안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정리에 전념했다. 『시경』과 『상서』를 정리 편찬하고 『예』와 『악』을 증보 수정했으며 『춘추』를 수정했다. 그가 가르친 제자는 3천 명이나 되었으며 그중에서 덕이 높고 육예에 정통한 현인이 72명이나 되었다. 공자는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후손들에게 풍부한 사상을 전해주었다. 인도주의로 충만한 인(仁)을 강조했는데 이는 동란이 많았던 춘추시대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를 대변해 준 사상이었다. 공자가 정리 편찬한 『춘추』, 『시경』, 『상서』 등은 후대의 학술사상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 출처: 공자, 유학의 선사[先師孔丘]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주)신원문화사)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공자님에 대한 여러가지 학술적 자료를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2016-10-09 11: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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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의 유학을 전수하는 중국유학관 개관   beercola   -   2016-10-09   16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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